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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5> 되돌아 본 중고교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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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5> 되돌아 본 중고교 생활

입력
2009.08.04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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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학 중 성적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차츰 개선되는 추세였다. 중학 1~2학년 때는 중상위권이었으나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는 60명의 반에서 1~2등을 했다. 인문계 성적은 좋았으나 실업과목 성적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나는 교내 문예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는데 거기서 발행했던 학생지 '기림(技林)'에 매번 학생논단을 기고하였다.

이 때 나의 학교생활에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한 두 가지 일이 있다. 그 하나는 이종표 교장선생님과의 이야기다. 교장선생님은 고창고보 졸업 후 서울공대를 나오신 훌륭한 교육자였으며 나를 매우 사랑해 주셨다. 그런데 1951년 정부가 각 도 마다 국립종합대학을 세우기로 하면서 전북에서도 전북대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그 중 공과대학을 이리공고에 세우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리공고는 새로 건물을 지어 나가야 하는데 이러한 사업 추진의 중심에 교장선생님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전북공대는 이리공고에서 문을 열었고 이리공고는 그 좋은 건물과 시설을 내주고 오늘의 자리로 옮겼다.

우리는 여기에 강력한 반대운동을 전개했으며 나는 확신을 가지고 그 선봉에 섰다. 지루한 반대운동을 하면서 우리는 교장선생님을 여러 번 만났는데 이 분의 말씀은 시종 '좀 더 멀리보고 크게 보라' 하시면서 당장 이리공고 교사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와 우리들의 후손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다.

그 분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으며 이 사건은 그 후 나의 사회생활에 있어 가치판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졸업하고 나서 약 10년 뒤, 내가 중앙공무원 교육원 강사로 있을 때 거기에 교육을 받으러 오신 선생님을 두어 번 만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선생님과 가끔 만났다.

그 뒤 40여년의 세월이 흘러 올 해 여의도 침례교회에 강의요청이 있어 갔다가 선생님의 막내아들 이경연 박사를 우연히 만났다. 이 분은 인천사랑병원 노인센터소장으로 있는데 부모님 내외와 두 형님이 모두 타계하셔서 이제 혼자 남았다고 했다.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은 급우 송준섭 과의 매우 작은 이야기이다. 김제에서 나와 같이 기차통학을 한 준섭은 공부 잘하고 매우 침착한 성품으로 나이는 나보다 한 두 살 위였다. 하루는 학업이 끝나 익산역으로 함께 가게 되었는데 꼬불꼬불한 논두렁길은 10m쯤 되는 구간에서 직선으로 가는 길과 ㄱ자형으로 굽어 가는 길로 갈렸다.

나는 직선 길을 가는데 그는 굽은 길로 갔다. 나는 두 점을 잇는 최단거리는 직선이라는 것을 기하학에서 배우지 않았느냐고 말했더니 그는 이렇게 작은 것은 기분 내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지 이런 것까지 효율을 따지면 삶이 메말라진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문제로 차를 탈 때까지 논쟁을 했다. 나는 나의 주장만 옳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나이 들수록 그의 주장도 옳다는 것을, 특히 일상생활이나 부부생활에서는 그의 생각이 옳은 때가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준섭은 6ㆍ25전쟁 이후 소식이 끊겼는데 30여년이 지나 내가 농업진흥공사 이사로 있을 때 그 곳 기술직 직원으로 있는 그를 우연히 만났다. 손을 잡고 반가워했으나 너무 짧은 만남이었다. 신장기능이 좋지 않았던 그는 그 뒤 얼마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내가 평생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속해온 일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일기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맨손체조 하는 것이다.

일기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쓰기 시작한 것인데 특히 어려움에 당면할 때마다 내게 자각과 용기를 줌으로서 나의 성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이번 한국일보에 글을 쓰는데 있어서도 그 동안 써온 일기가 결정적인 자료가 되어 주고 있다.

맨손체조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일 아침 하고 있다. 해외여행 중에도 밖에 나와 맨손체조를 하면 사람들이 이상한 듯 쳐다보곤 했다. 내가 몸을 함부로 하는데도 비교적 좋은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6년 동안 기차통학에서의 단련과 평생 동안 지속한 맨손체조의 덕이 아닌가 한다.

지난해 나는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받기 위해 오랜만에 이리공고를 방문했다. 전교생에게 나의 살아온 길, 그리고 학생들에게 하고픈 얘기를 하고 선생님들도 모두 만났다. 졸업한지 55년, 그 동안의 변화를 보는 감회가 매우 컸다.

얼마 전 나는 고향마을에 내려간 김에 오십여년 전 기차통학 할 때 다니던 김제역까지의 십여리 길을 걸어서 가본 일이 있다. 그 길은 논두렁 밭두렁을 끼고 가는 꼬불꼬불한 길이었으며, 마을 사람들이 김제 장에 갈 때마다 뻔질나게 다니던 그런 길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마을 앞 논에는 공단이 들어섰고 김제역으?가는 길은 아예 없어져 버린 것이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은 더 넓어지고 포장까지 됐는데 사람이나 우마차가 다니던 길은 논길도 밭길도 모두 없어졌다. 큰 저수지 자리에는 병원이 들어섰고, 무서워 피해 다니던 공동묘지에는 노인복지센터가 들어섰으며, 일본 사람들이 화장터로 쓰던 산에는 고층 아파트가 솟아 있었다. 발전의 모습이라 하지만 상전벽해의 변화에 무상과 허무의 감회를 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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