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바둑 랭킹 1위 이세돌이 갑작스레 휴직을 선언하고 국내ㆍ외 공식기전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최근 몇 년 간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공식 대국을 치르는 강행군을 해 왔던 한국 최고 기사 이세돌이 오랜만에 자의반타의반으로 맞은 '휴식' 기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휴직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10세 때 바둑 공부를 위해 서울로 올라온 후 사실상 처음 맞는 휴가다. 7월 초 중국리그가 끝난 후부터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푹 쉬었다. 특히 바둑과는 완전히 담 쌓고 지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도장에 나가 제자들을 돌보는 것 외에는 국내ㆍ외 바둑 소식이나 실전 기보 등에 일체 관심을 끊었다. 대신 그동안 바빠서 만나지 못했던 친지들과 만나 밥도 먹도 술도 마셨다. 얼마 전엔 이창호 사범님과 식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밖에 평소 생활과 달라진 점은.
"글쎄. 좀더 가정적이 됐다고나 할까. 아무래도 집에 오래 있으니까 전보다 아기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지난주부터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중국인 여자 선생님에게 일주일에 두 번씩 집에서 개인 지도를 받는다. 휴직 기간 내내 열심히 해 볼 생각이다. 테니스나 다른 운동을 좀 배워 볼까 했는데 정기적으로 시간을 정해서 하는 건 통 자신이 없어서 조깅이나 등산같이 혼자서 마음 내키면 언제라도 쉽게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했다. 주로 저녁 시간에 집 근처 한강둔치를 30분 가량 달린다. 어떤 때는 밤 12시 넘어 뛰기도 한다. 시원하고 사람이 없어서 좋다."
-바캉스 계획은 없나.
"고향이 천혜의 관광지인데 달리 어딜 가겠는가. 가족과 함께 비금도에 가서 며칠 쉬다 올 계획이다. 중국리그가 9월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지금처럼 바둑과 전혀 무관하게 지낼 생각이다."
-8월 말 구리와 봉황고성배 대회가 예정돼 있다. 현재 전적이 9 대 9로 팽팽한데 승부를 예측한다면….
"봉황고성배는 타이틀전이 아니라 이벤트대회다. 승부보다는 행사 목적이 더 강하다. 제한 시간도 50분 타임아웃제여서 대국에 최선을 다할 수 없다. 물론 이기면 좋지만 승부를 떠나 즐기는 기분으로 임할 것이다. 사실 구리와는 며칠 전에 베이징에서 만나 한 잔 했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보고 싶어서 내가 찾아갔다. 구리는 나이도 같고 바둑 스타일도 비슷해 무척 친근하게 느껴진다. 흔히 이창호 사범과 창하오의 우정을 이야기하는데 우리도 그처럼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고 싶다."
-구리와 10번기 대결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공식적으로 그런 얘기를 전혀 들은 게 없다. 만일 성사된다면 나로서야 물론 반가운 일이다."
-국내에서 친한 동료기사를 꼽는다면….
"동갑인 염정훈(6단)이 가장 가까운 술 친구다. 그밖에 몇 명 친하게 지내는 젊은 기사가 있지만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주량이 상당하다 들었다.
"그렇지 않다. 자주 마시기는 한다. 실은 가끔 폭음을 하는 게 문제다. 필름이 끊긴 적도 있다. 앞으로 자제하려 한다. 담배도 주위에서는 끊으라고 하는데 아직 결심이 안 선다. 하지만 집에서는 아기도 있고 해서 안 피운다. 다른 취미 생활을 좀 해 볼까 했는데 마땅한 걸 찾지 못했다."
-당구를 잘 친다던데….
"잘 못 친다. 한 150점 정도. 스리 쿠션은 그보다 조금 낫다. 전에는 김승준 이재웅 조한승 사범 및 바둑 해설자 김지명씨와 자주 쳤는데 요즘은 좀 뜸하다."
-별로 기분 좋은 화제가 아니겠지만 이제 마음의 상처는 좀 아물었나.
"많은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 하지만 다중 혹은 집단의 잘못이나 횡포에 대해 개인이 어떻게 대응할 수 있겠는가. '결국은 내가 마음을 추슬러야지'하고 생각하지만 사람인 이상 쉽게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는다. 좀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프로기사는 팬들에게 최고의 바둑을 보여 주는 게 가장 큰 의무다. 경위야 어떻든 본의 아니게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게 돼 죄송스럽다. 대회 스폰서들께도 미안하다. 특히 리그 중간에 떠나게 된 GS칼텍스배가 가장 마음에 걸린다."
-너무 성급한 얘기 같지만 조기 복귀 가능성은.
"사람의 일이란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므로 조기 복귀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당초 예정했던 1년 6개월에 비해 단축되기보다는 오히려 더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더라도 국내 기전에는 출전하지 못할 것 같다. 가능하다면 세계 기전에 주력할 생각이다."
-내년에 중국리그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올?중국리그에 계속 나가기로 한 건 지난 5년 간 주장을 맡은 꾸이저우팀을 꼭 한 번 우승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올해 우승한다면 내년에는 쉬기로 이미 얘기가 돼 있다. 그러나 이번에도 우승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지 아직 모르겠다. 현재 꾸이저우팀이 4위지만 선두권이 강팀이 아니므로 충분히 역전을 노릴 수 있다. 중국리그에서 매년 7, 8판 정도 뒀는데 상반기에 이미 5판을 뒀다. 올해는 하반기에도 7, 8판 정도 더 출전, 반드시 좋은 성적을 거둬 꾸이저우팀 우승에 기여하고 싶다."
-휴직 기간에 아시안게임이 열린다. 나갈 생각이 있나.
"내가 먼저 나서서 뭐라 할 사안은 아니고 바둑계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참여해 한국의 우승을 위해 힘을 보탤 것이다."
-앞서 휴직에 즈음한 기자회견 때 앞으로 바둑 외의 일도 해 볼 생각이라고 했는데….
"딱히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 아니지만 꼭 바둑과 관련된 게 아니더라도 무슨 자영업 같은 걸 해 볼까 하는 생각은 있다. 실은 작년 가을 경기 수원시에 있는 조그만 맥주집에 투자했다. 잘 아는 분이 경영을 맡고 있는데 아직 별 수익은 없다."
-그렇다면 프로기사 생활을 그만 둘 생각이 있다는 건가.
"그런 건 아니고 다만 내가 과연 정상급 기사로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있다. 조훈현 국수의 경우 50세 정도까지 정상을 지켰지만 요즘은 후배들의 추격이 워낙 거세므로 그때까지는 힘들 것 같고 한 40세까지만 버티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후배들 중에서 강자들을 꼽는다면….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최철한 박영훈과 요즘 조금 안 좋지만 원성진 정도가 아닐까. 여기에 강동윤이 당연히 포함될 것이고. 김지석 박정환은 충분히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뚜렷한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어 선뜻 거론하기 조심스럽다. 정상급 기사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 번쩍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
-이창호가 세계대회서 7회 연속 준우승했다. 부진이라 보는가.
"7회나 결승에 올라갔으니 결코 부진이라 할 수는 없다. 다만 결정적 순간에 맞춰 자신의 컨디션을 최고의 상태로 만들지 못하는 게 문제다. 아직도 몸 상태가 완전치 않은 것 같다. 한국 바둑을 위해서는 이창호 사범이 좀더 버텨 줘야 한다."
박영철 객원기자 indra@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