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엥겔 지음ㆍ배현 옮김/알마 발행ㆍ216쪽ㆍ9,500원
독특한 캐릭터의 탐정 베니 쿠퍼맨을 주인공으로 한 추리소설 시리즈로 1980년대부터 명성을 얻은 캐나다 작가 하워드 엥겔(78). 2001년 어느날 아침 그는 당황스러운 경험을 한다. 조간신문의 활자들이 마치 쐐기 모양 같은 키릴문자로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가벼운 뇌졸중이라고 생각해 병원을 찾은 엥겔은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는다. 좌뇌의 시각피질이 손상돼 더 이상 글자를 읽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글자를 읽을 수 없는 작가는 마치 배수구를 멀리하라는 명령을 받은 배관공, 돈 거래를 하지 말라는 은행원 꼴과 다름없었다. 읽을 수는 없지만 쓰기는 가능하다는 것이 위안이었지만 그것은 기껏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하지만 신발과 양말은 간직해도 좋다'는 정도의 위로에 불과했다.
<책, 못 읽는 남자> 는 '실독증'(alexia)이라는 희귀한 질병을 앓게 된 작가가 깊은 절망에서 일상생활로 돌아오기까지의 분투를 감동적으로 그린 수기다. 실독증은 건망증과 함께 찾아왔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길을 잃기 일쑤였고 입원한 병동이 몇층인지를 잊어버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심장을 멈출 수는 있을지언정 독서를 멈출 수는 없다'는 신조로 살아왔던 그의 절망이 어떠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간판을 봐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고 맥주집에서 맥주 한 잔도 주문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지만 그에게 낙담은 없었다. 책,>
보이지 않는 글자, 잠시만 지나도 뒤죽박죽이 되는 기억력 등 갖은 난제 앞에서도 엥겔은 '글쓰기'에 도전했다. 주의력을 흩뜨리지 않기 위해 라디오도 틀지 않고, 활자의 포인트를 2배로 키우고, 경고음이 들리는 컴퓨터 맞춤법 기계도 사용했다. 그 분투의 결과가 이 책이다. 그는 쓴다. "사는 게 그렇다.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있다. 때로는 힘들고 혼란스럽지만 그 다음 날에 일이 쉽게 풀리면 보상이 된다… T S 엘리엇이 항상 지적하듯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다 같은 것이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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