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고 작은 제비꽃'. 학창시절 동급생들은 늘 조용하고 말이 없는 그를 이렇게 불렀다. 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이 16개월의 결장암 투병 끝에 1일 76세로 타계했다. 아키노는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 촉망 받는 젊은 정치인의 아내가 되었지만 1남4녀를 낳아 기르는 평범한 주부 역할에 충실했다. 그런 그를 20여 년 장기 독재의 마르코스 정권이 어느 날 갑자기 역사의 무대 위로 호출했다. 1983년 8월21일, 3년 간의 미국 망명 생활을 접고 귀국을 감행한 남편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가 마닐라 공항에서 독재정권의 비밀 요원에게 암살을 당한 것이다.
▦남편의 장례식에는 200만 명의 애도 인파가 몰렸다. 그들은 노란 면 옷을 입고 거리의 나무 가지에 노란 리본을 달았다. 대규모 반 마르코스 운동으로 번진 노란 물결의 중심에 남편의 유지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에 뛰어든 '코리'(코라손 아키노의 애칭)가 있었다. 그는 다양한 노선의 반 마르코스 정치세력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유일한 상징적 존재로 자연스럽게 부상했다. 마르코스가 정치ㆍ경제적 혼란의 탈출구로 삼기 위해 1986년 2월 전격 실시한 대선에서 야당연합의 단일후보로 추대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선거결과는 아키노 후보의 패배였다. "국가운영 경험이라곤 전무한 가정주부에게 표를 줄 것인가"라는 마르코스의 선전이 먹힌 측면도 있지만 조직적 부정선거의 결과였다. 선거 참관인들이 선거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미국 등 국제사회도 마르코스 정부의 선거부정과 폭력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수백만 필리핀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아키노는 비폭력 저항을 외쳤고 군부도 가세했다. 결국 마르코스 부부는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고, 아키노는 필리핀 최초 여성 대통령에 취임했다. 피플파워가 이룬 혁명 드라마였다.
▦아키노는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집권 6년 동안 7차례나 군부 쿠데타에 시달렸고 필리핀 사회의 구조적 한계에 부딪혀 개혁에 실패한 탓이다. 그러나 6년 단임제 실현 등 민주주의 정착에 기여했고, 한국의 수평적 정권교체 등 아시아의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투병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을 맺기도 했다. 퇴임 후엔 해비타트 운동 등 봉사활동에 열심이었고, 현실정치에도 끊임 없이 자기 목소리를 냈다. 그는 아시아의 캄캄한 독재의 밤에 밝게 빛난 민주주의의 샛별이었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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