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0월 한국수력원자력의 전신인 한국전력과 원자력 발전의 설계 기술 자립을 위해 출범한 한국전력기술의 엔지니어 100여명이 미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탔다. 세계적인 원전 설계 및 건설사인 벡텔 본사에서 선진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받기 위해서다. 그러나 말도 잘 안 통하는 타향에서 생소한 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벡텔은 핵심기술에 대한 자료나 표준문서 등이 유출되지 못하도록 철저한 보안을 지켰다. 우리 엔지니어들은 교육 자료라도 복사해 본사로 보내며 어깨 넘어 기술들을 익혀 갔다. 그러나 나중엔 이마저도 적발당해 해당 엔지니어들이 쫓겨나고 귀국조치 되는 수모를 겪었다.
#한국전력기술은 지난해 미국 웨스팅하우스(WEC)와 AP1000(WEC 개발 원자력발전소 최신 노형) 프로젝트의 종합설계 용역 계약을 따 냈다. 특히 역대 가장 높은 설계 용역 단가를 요구, 이를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다. WEC는 마뜩잖은 표정이었지만 한국의 원전 설계 능력이 이미 세계 최고 수준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앞서 2006년에는 벡텔과 640만달러 규모의 기술지원 용역 계약도 맺었다. 벡텔이 수주한 원전 및 화력발전소의 설계를 우리가 해 주는 것이 골자였다. 비웃음과 무시를 받으며 기술을 배워갔던 동양의 한 작은 나라가 이젠 벡텔에 한 수 가르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 관련 설계, 건설, 운영, 관리 능력 등이 세계 최고 경쟁력을 확보했다. 전 세계가 원자력 발전을 외면할 때 우리나라에선 지속적인 원전 건설과 운영을 통해 실력을 키워 온 덕이다. 이젠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에 이어 원자력 발전이 우리의 달러 박스가 될 차례다.
원자력 발전이 최근 주목되는 것은 무엇보다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동되고 있는 원전은 31개국 439기. 1979년 미국 쓰리마일아일랜드 원전 사고와 86년 옛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원전에 대한 관심은 크게 줄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세계 각국이 고유가 및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대안으로 원자력 발전에 다시 눈을 돌리면서 원전 시장도 급성장이 예고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203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무려 300기의 원전이 신설될 것으로 보인다. 원전 1기당 계약액을 2조~3조원으로 잡는다면 600조~900조원의 시장이 열리는 셈이다.
미국은 이미 30기 이상의 원전 건설 인허가가 진행중에 있고, 프랑스도 기존 원전을 대체하기 위해 2012년부터 매년 1기씩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이다. 특히 중국은 2020년까지 원전 40기 이상을, 인도도 2030년까지 원전 50기 이상을 증설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러한 황금 어장을 지금은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와 프랑스의 아레바가 50% 이상 차지하고 있다.
변화된 환경과 더불어 우리나라가 원전 수출에 승부수를 던지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형 원전의 경쟁력이 매우 높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용률은 세계 최고이고, 정지 건수는 가장 낮다. 또 수명은 가장 긴데 건설비는 가장 낮다. 실제로 아직 규모는 작지만 원전 수출 실적에서 기자재 및 용역 수출의 규모가 증가하고 있다.
물론 관건은 원전 플랜트 수출이다. 원전 수출 관련 기능이 분산되어 있던 것을 한전과 한수원을 중심으로 집결, 체계를 일원화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특히 원전 플랜트 수출은 국가 대항전 성격이 강한 사업인 데다가 상업성은 물론 정치ㆍ외교적 협상의 산물이란 점에서 국력의 총아라고 할 수 있다.
한수원 관계자는 "원전은 APR1400 2기를 수출할 경우 생산 유발 효과가 무려 6조원이 넘고, 직접 고용 창출도 2,000명이 넘는 고부가가치의 신성장산업"이라며 "지난 30여년 동안 기술을 자립,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갖춘 만큼 올해안에 원전 플랜트 수출의 꿈을 이뤄 미래의 거대 원전 시장을 선점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일근 기자 ikpark@hk.co.kr
■ 우리나라 원전 경쟁력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최근 우리나라에 30여년만에 어떻께 원전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는 지 가르쳐달라며 공식 요청했다. 그들에게 우린 이미 신화이다. 우리나라는 어떻게 이런 일을 이룰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 원전은 사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빼 놓고는 말하기 힘들다. 자원빈국인 우리나라가 산업 발전을 위해선 원전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그의 판단이 결국 오늘의 한국 원전이 가능하게 했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그러나 원전 기술 습득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외국 주계약자가 발전소 착공부터 준공까지 모든 책임을 지고 수행하는 일괄발주방식으론 배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영광 1,2호기부터는 기술전수 계약을 따로 체결했다.
기술을 전수 받는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공사를 준 것이다. 그럼에도 선진 업체들은 가능한 기술의 전수를 꺼렸다. 이 때문에 우리 엔지니어들은 퍼즐의 빠져 있는 조각들을 상상으로 만들어가면서 어렵게 기술을 익혔다.
환경도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두 차례의 원전 사고 이후 선진 기업들이 20여년간 실제로 원전을 지을 기회가 없었던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꾸준히 원전을 건설,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선진국의 원전 엔지니어들은 대부분 은퇴하게 됐다.
제품력도 뛰어나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로 수출하기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원전 상품은 바로 APR1400(Advanced Power Reactor 1400)이다.
1,000㎿급 한국 표준형 가압 경수로인 OPR1000(Optimized Power Reactor 1000)을 개선, 2002년 리히터 규모 7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는 1,400㎿급 3세대 신형 원자로로 개발했다. 수명은 20년 더 길어졌고 건설 및 발전 단가는 10%나 낮아졌다.
특히 운영능력에선 발전소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운영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인 불시 정지 건수가 지난해 20기를 운영하며 단 7건에 불과할 정도로 세계적인 수준이다. 설비의 건전성 및 운영 인력의 우수성 등 발전소 운영기술 수준을 평가하는 원전 이용률도 1990년대 후반 이후 줄곧 90%를 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원전을 건설할 수 있는 능력도 갖췄다. 일본이 65개월의 시공기간 목표로 삼고 있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울진 6호기를 55개월만에 완공됐다.
신고리2호기의 시공 목표는 50개월이다. 물론 가장 저렴하게 건설할 수 있다는 것도 강점이다. 미국과 프랑스의 차세대 원전의 건설 단가가 ㎾당 3,000~4,500달러 수준인 반면 우리나라는 2,000~2,500달러로 지을 수 있다.
박일근기자
■ 김종신 한수원 사장 "공기업이 사회적 책임 다해야 원전 이미지 개선"
"고리 1호기 건설 당시 고작 사택이나 짓고 모래와 자갈을 운반하는 정도였던 우리가 이제 원전 수출을 앞두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72년 한국전력으로 입사, 40년 가까이 원자력사업에 몰두해온 김종신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은 "1인당 국민소득이 불과 70달러에도 못 미치던 70년대 원전을 도입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며 "원전업계 종사자의 피와 땀이 결국 이런 불가능을 극복하고 전력대국, 원전강국의 꿈을 이뤘다"고 밝혔다.
김 사장은 특히 원전은 다른 산업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원전을 통해 공급된 양질의 값싼 전기는 우리나라 산업 경쟁력의 키우는 데 한 몫 했다"며 "원자력 기술을 자립하는 과정에서 얻은 최첨단 과학 기술이 조선이나 반도체 산업의 밑바탕이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 국가가 지난 30여년간 신규 원전 건설을 중단한 반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원전 건설을 추진, 풍부한 경험과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며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요르단, 터키, 루마니아 등을 대상으로 한국형 원전 수출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만큼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한편 김 사장은 "공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도 원전 이미지를 개선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일자리 창출을 위해 올해 '원전건설 훈련원'의 입학 정원을 100명에서 590여명으로 늘리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2년 이상 근무한 기간제 근로자 전원을 무기계약으로 전환한 데 이어 이들을 정규직으로 바꾸는 방안도 추진하겠다"며 "서민들을 위한 지원방안도 마련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박일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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