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활동을 하면서 어떻게 조각을 할 것인지 방향을 가늠할 지표로 삼아 온 말들이 있다. 처음 조각을 시작하던 때에는 문자향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것이 돌로 만들어졌든 철이나 나무로 만들어졌든, 예술 작품은 문자 냄새가 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문학적 교양이 조각 재료와 화학반응을 일으켜 한 덩어리로 굳어버린 작품이 가장 훌륭하게 보이던 때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지나치게 현학적인 작품은 관객을 위축시키려 드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당시 프랑스 미술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프랑스 학생들이 얼마나 달변이었는지 평범한 작품을 한 개 들고 와서 지도 교수님과 1시간도 넘게 토론을 벌이는 것을 보며 이론이나 논리라는 것에 회의가 들었다. '작가는 말은 좀 못해도 작품을 잘 해야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말을 잘 못하자'라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야 작품이 잘 될 것 같았다. 이 신조 때문이었는지 작품은 둘째로 치고 그렇잖아도 말을 잘 못하던 내가 말을 더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니체의 프랑스판 책을 뒤적이다가 멋진 문장을 발견했다. "끊임없이 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되라. 네 자신의 주인, 네 자신의 조각가가 되라"라는 문장이었다. 스스로를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불렀던 니체는 인간을 대리석임과 동시에 그것을 깎는 조각가라고 보았다. 니체에 따르면 예술가로서의 인간은 문화의 창조자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만들어내는 존재로써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최고의 조각가란 응당 자기 자신의 조각가인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당장 이 문장을 불어로 써서 책상 위에 붙여 놓았다. 조각가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좌우명은 없을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미완성으로 남긴 여러 개의 '노예상'은 니체가 말한 '네 자신의 조각가'를 잘 표현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을 일컬어 "돌 속에 이미 들어 있는 형상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가 남긴 미완의 '노예상' 중 하나는 거의 온 몸이 원석 속에 잠겨 있고 일부분만 분리되어 있다.
그 작품 속의 인물은 원석에 갇힌 신체의 나머지 부분을 해방시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노예상'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중에서 비교적 덜 알려진 것이지만 자신을 스스로 형성하려는 의지를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본주의 시대를 대변할 만한 걸작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최근에는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돌을 자르고 쪼고 갈아서 옥을 만들 듯 학문을 연마하고 덕행을 쌓으라는 내용이 조각가에게 잘 어울릴 법하다. 일반적으로 단단한 경성 재료를 다루어야 하는 조각가에게는 육체적 끈기가 요구된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조각하듯 학문과 덕행을 쌓으라고 했을까.
꽤 오래 전부터 조각은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3D 직종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과 영상 기술의 발전으로 요즘은 작가들이 실제로 조각 작품을 만들기 보다는 3D 그래픽 작업을 통해 영상 속에서 입체적 효과를 구현하는 작품을 선호하기도 한다.
갈수록 땀방울의 의미가 소중해지는 세상이다. 먼지에 뒤 덮인 작업실에서 조각은 결국 노동으로부터 이루어진다는 평범한 사실을 깨달으며 절차탁마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그래서 자코메티도 "신처럼 창조하고 노예처럼 일한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을 것이다.
전강옥 조각가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p>저작권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