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칵, 찰칵.' 25일 오전 9시40분께 서울 국립극장 앞 남산 산책로. 빗방울을 머금은 참나리 꽃밭에 연방 카메라 셔터 소리가 퍼졌다. "오빠, 왼쪽 꽃은 약간 잘렸고 오른쪽 꽃은 핀이 잘 안 맞았어."
이다혜(20ㆍ상명대 사진영상미디어 전공)씨가 김민석(22ㆍ인천혜성학교)씨의 손을 잡고 디지털카메라 액정화면을 짚어가며 말했다. 김씨는 액정에 점자라도 찍힌 듯 손끝으로 조심스레 더듬더니 다시 셔터를 눌렀다.
"어때, 아까보다 나아?" "응. 그런데 한 번에 누르면 안돼. 살짝 눌러서 띠릭~ 소리가 난 뒤 찰칵~ 해야 해." 고개를 끄덕이던 김씨는 이씨의 팔을 꼭 붙들고 남산타워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뗐다. 그는 6세 때 뇌종양으로 시력을 잃은 1급 시각장애인이다.
이날 카메라를 들고 2.4㎞에 이르는 남산 산책로를 따라 '촬영 나들이'에 나선 이들은 상명대 영상미디어연구소가 3년째 열고 있는 시각장애인 대상 사진교실 '마음으로 보는 세상' 참가자들이다. 올해엔 1급 장애인 11명이 참가했고, 상명대 영상학부 학생 12명이 이들을 돕는 '멘토'로 나섰다.
지난달 중순 반포한강공원에 첫 '출사'를 나간 것을 시작으로 10월 초까지 격주로 이론 또는 현장 교육이 이어진다. 수강생들의 작품을 모아 10월에 사진전을 열고, 우수작을 선별해 2010년도 서울시 달력 제작에도 사용할 예정이다.
시각장애인이 사진을 찍는다? 언뜻 이해하기 힘든 일을 가능케 한 것은 1대1 멘토링이다. "앞에 물기 머금은 꽃 두송이가 있어요", "10m 앞 갯벌에 조개 줍는 할아버지가 지나가네." 멘토들은 장애인들 곁에 꼭 붙어 눈 앞의 광경을 일러준다. 촉각이나 소리에 민감한 시각장애인들은 특히 화초나 동물 등 '손으로 느끼고, 귀로 듣는' 사진에 두각을 나타낸다고 한다.
물론 머리 부분이 잘린 비둘기, 초점인 꽃보다 선명하게 찍힌 풀잎, 기우뚱하게 선 이순신장군상 등 엉뚱한 작품들도 나온다. 하지만 뒤집히고 비뚤어진 이 사진을 지도교수들은 "일반인들은 두 눈을 뜨고도 못 찍는 뉴 비전"이라고 칭찬한다.
양종훈 상명대 영상학부 교수는 "기존 프레임에 지나치게 갇힌 일반인에 비해 강박관념이 없는 시각장애인들은 중앙과 사이드를 맘껏 돌파하며 축구장을 넓게 쓰듯 사물을 담는다"고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2년 연속 사진교실에 참가하고 있는 박규민(31)씨가 거꾸로 찍힌 경복궁 사진을 한상일 교수에게 가져왔다. 잘못 찍은 사진인줄 알았는데 박씨의 대답은 이랬다. "거꾸로 찍으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어요." 이 사진은 지난해 사진전에 전시됐다.
참가자들의 이력도 다양하다. 안내견 '슬기'와 함께 온 김경식(48)씨는 시집 <눈먼 화가의 화선지> 등을 펴낸 시인이다. 그는 "남산의 감춰진 모습을 담아 시와 사진이 어우러진 책을 내고 싶다"고 했다. 그 책은 희귀병을 앓는 노모에게 제일 먼저 보여드리겠다고 했다. 김민석씨는 지난해 프로농구팀 인천 전자랜드 개막전 시구자였다. 눈먼>
어머니 이영숙(50)씨는 "다른 팀은 박태환 선수 등이 나왔는데 만일 지면 장애인이 시구해서 졌다는 소리가 나올까봐 조마조마했다"면서 "요즘 걸핏하면 카메라를 '들이대는' 민석이가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며 어른스러워졌다"며 흐뭇해 했다.
학생 멘토 이수진(22)씨도 2년째 참가하고 있다. 지난해 손발을 맞췄던 권도연(28)씨와 올해도 짝꿍이 됐다. 이씨는 "3학년인데다 스튜디오 인턴 일 때문에 잠시 주저했지만 도연이 언니가 한 번 더 한다기에 당연히 참석했다"면서 "항상 딱 떨어지게 찍는 우리와 달리 느끼면서 찍는 언니에게 배우는 것도 많다"고 말했다.
박규민씨를 '꽃사진의 달인'이라 추켜 세운 장연호(25)씨는 "규민씨는 다른 감각을 통해 찍는 것 같다. 처음엔 가볍게 봉사한다는 생각이었는데 이젠 공동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함께 한다"고 했다.
이날 사진교실은 가족나들이 같은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김경식씨는 딸과 동갑인 홍하니(19)씨를 일러 "늘 살갑게 대하는 게 진짜 딸 같다"고 칭찬했다. 송혜옥(60)씨의 멘토 박소진(24)씨는 송씨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오전 11시를 조금 넘겨 도착한 남산 봉수대. 마침 봉수대 봉화의식으로 인파가 북적댔다. 순라꾼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는가 하면 인간 형상 철구조물도 "하늘에 걸린 실루엣"처럼 멋있게 담아냈다.
이를 지켜보던 미국인 관광객 댄 오코너(57)씨는 "뉴욕에서도 시각장애인이 사진을 찍는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너무 뜻 깊은 장면"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남산 촬영을 마친 이들은 케이블카에 올랐다. "대각선 방향으로 나무가 가렸어요" "아까 걸어온 산책로가 저기에요". 3분 남짓한 탑승 시간에도 이들은 유리창에 바짝 붙어 셔터를 눌러댔다. 15㎠ 남짓한 카메라 액정화면이 쪽빛 하늘 아래 활짝 웃는 이들의 미소로 가득 찼다.
장재용 기자 jy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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