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 지음/예담 발행ㆍ420쪽ㆍ1만2,800원
"외모는 돈보다 더 절대적이야. 인간에게, 또 인간이 만든 이 보잘것없는 세계에서 말이야. 아름다움과 추함의 차이는 그만큼 커, 웬지 알아? 아름다움이 그만큼 대단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만큼 보잘것없기 때문이야. 보잘것없는 인간이므로 보이는 것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거야. 보잘것없는 인간일수록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세상을 사는 거라구."(219쪽)
엉뚱한, 혹은 황당무계한 상상력으로 소설의 집을 짓고 있는 '무규칙 이종(異種) 소설가' 박민규(41)씨가 연애소설을 썼다. 인주(印朱)를 풀어놓은 듯 붉게 물든 석양, 몽환적인 비틀스의 사이키델릭 음악, 색색의 조명이 들어온 놀이공원…. 소설 속에는 "어 이거 박민규 거 맞아?"라고 눈을 비비고 볼 만큼 달콤한 연애 장면들이 펼쳐져 있다.
낭만적 연애의 주인공들은 누구인가. 화자인 남자주인공은 고교를 졸업한 열아홉 청년이다. 그는 미남 배우 출신인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전형적인 꽃미남. 본인이 잘 생겼건 아니건 유사 이래 아름다운 여성에 호감을 느끼는 것이 남자들의 본성이건만 이 청년, 좀 독특하다.
눈웃음만 살짝 지어도 비음 섞인 목소리로 "오빠"를 외치며 자신을 따라올 여성들이 줄을 섰지만, 그의 파트너는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남자들이 벌칙 때문에 억지로 말을 걸어오는 상대가 되기 일쑤인 못생긴 여성이다. 작가는 남자 주인공이 외모 관리에만 평생 신경을 쓰다가 성공을 거두자 박색인 어머니를 버리고 젊고 예쁜 여성과 재혼한 아버지를 두고 있다는 식의 가족사를 그 배경으로 설정했으나, 두 남녀의 결합은 현실에서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연애소설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이 소설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소외자들, 권력의 바깥에 위치한 마이너리티들에 각별한 애정을 표시해온 작가의 문제의식과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사회소설이기도 하다. 두 남녀가 결합하는 시대적 배경이 1980년대 중반인 것도 예사롭지 않다. 작가는 화자의 말을 빌어 그때를 "'좋은 것'이 '옳은 것'을 이기기 시작한 시대였고, 좋은 것이 옳은 것이 되는 시절, 학력에서 경제력에서… 또 외모에서 한눈에, 또 첫눈에 대부분 승부가 판가름 나'기 시작한 때라고 기억한다.
작가는 돈 많고, 크고, 강하고, 아름다운 것이 비로소 한국사회의 지배원리가 되기 시작한 그 시기를 무대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남녀를 결합시킴으로써 인간을 속물화시키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사랑만이 그것을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화자의 멘토 격인 사내 요한의 입을 통해 '남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부와 외면적인 아름다움에 집착하지만, 정작 자기자신의 내면적 자아를 가꾸는 데는 무관심한 현대인을 꼬집는다.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민주주의니 다수결이니 하면서도 왜 99%의 인간들이 1%의 인간들에게 꼼짝 못하고 살아가는지, 왜 다수가 소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그건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하기 때문이야."(174쪽)
자신의 외모를 감당하지 못하는 여자는 끝내 남자를 떠나지만, 15년 뒤 이들은 감격적으로 해후한다. 이들의 사랑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라이터스 컷'(영화의 '디렉터스 컷' 같은 후일담)을 통해 작가는 다양한 해석의 장을 마련해 뒀다. 박민규답다.
이왕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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