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태국 푸껫에서 끝난 제16차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은 북한과 미국의 인식 차를 확인한 자리였다. 포괄적 패키지 방안, 기자회견을 둘러싼 북미의 미묘한 신경전도 눈길을 끌었다.
이날 오전 ARF 본회의부터 북미의 논리 대결은 치열했다. 북한 대표단장 박근광 전 나미비아 대사는 "미국과 남한의 시대착오적 적대 행위가 아시아태평양 지역 안전 파괴의 주범"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맞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미국의 위협 때문에 북한이 핵무장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공박했고,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도 "북한은 6자회담에 조속히 복귀하라"며 다그쳤다.
이어 푸껫 쉐라톤호텔 내 기자회견 장소를 두고도 묘한 상황이 연출됐다. 미국 측이 클린턴 장관의 기자회견을 준비하던 곳에 리흥식 외무성 국장 등 북한 대표단이 회견을 하러 나타났지만 미국이 양보하지 않는 바람에 장소를 옮긴 것.
결국 다른 회견장에서 기자들 앞에 나선 리 국장은 작심한 듯 미국을 공격했다. 그는 목소리를 높여 "조선반도 현 위기 상황의 본질은 미국의 뿌리 깊은 적대시 정책 결과다" "미국이 칼을 빼면 우리도 칼을 뺀다" 등의 공격적 발언을 이어갔다.
그는 특히 미국이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회심의 카드로 제시한 '포괄적 패키지' 방안을 전임 부시 정권의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방식 핵폐기 압박이라며 일축했다. CVID의 경우 과거 6자회담 과정에서 북한이 가장 강하게 반발했던 원칙인 만큼 향후 북핵 협상에서도 이 문제가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틀째 북한 관련 기자회견을 자청한 클린턴 장관도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북한은 오늘날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핵무장을 정당화하는 북한의 주장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한국 정부도 바삐 움직였다. 유 장관은 이날 한러 외교장관 회담을 끝으로 사실상의 5자협의를 마쳤다. 6자회담 수석대표인 위성락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도 회의장 주변에서 미 중 일 러 대표와 연쇄 회동을 갖고 북핵 현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21일에 이어 이날도 포괄적 패키지 논공행상에 치중했다. 김성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이날 재향군인회 초청 강연에서 "지난달 한미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북한이 비핵화를 선언하면 원하는 것을 주고 한꺼번에 해결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했고 오바마 대통령도 충분히 공감했다"고 소개했다. 포괄적 패키지 아이디어의 지적재산권이 한국에 있다는 자랑이었다.
푸껫(태국)=정상원 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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