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국경이 무너지고 있다. 지난 13일 세계 최대시장 유럽연합(EU)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타결은 우리나라가 '동북아의 FTA 허브'로서 세계 각국이 벌이는 'FTA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라설 수 있는 계기가 됐다.
FTA는 1대 1로 국가 간 관세장벽 등 무역국경을 제거하는 '특별 동맹'으로, 경제 국경 해체의 첫 단계인 셈이다. 5월 말 현재 전 세계에서 발효 중인 FTA는 상품협정 152건을 포함해 총 247건이다.
관세장벽을 없앤 자유무역지대와 같은 가장 낮은 단계의 경제통합에서 출발해, 공동시장으로, 통화동맹으로, 그리고 EU와 같은 경제합중국 단계로 발전하며 세계 곳곳에서 경제 국경이 해체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각국이 보호무역 조치를 강화하는 와중에도 FTA는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올 들어 세계무역기구(WTO)에 발효 개시를 통보한 FTA는 미국-오만, 미국-페루, 중국-싱가포르, 중국-뉴질랜드, 호주-칠레 등 모두 7건이다.
FTA동맹을 선점하기 위한 세계 각국의 경쟁도 치열하다. 여기서 뒤처지면 FTA 선점 국가들에 시장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하지만 FTA가 단지 수출 영토를 넓히는 정도의 경제적 목적만 위한 것은 아니다.
박번순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FTA는 관세장벽 해체와 같은 경제적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 전략적 동맹을 강화하는 주요한 수단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경제대국만 FTA전쟁의 승자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실제 칠레, 싱가포르 등 작지만 교역비중이 큰 나라들이 FTA 선두에 서있다. 칠레와 싱가포르는 2008년 말 현재 FTA 체결국가와의 교역 비중이 각각 83%, 68%나 된다.
우리나라는 비록 출발이 늦었지만,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칠레(2004년 4월 발효)를 시작으로 싱가포르(2006년 3월 발효), 유럽자유무역연합(EFTAㆍ스위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ㆍ2006년 9월 발효), 아세안(ASEANㆍ상품협정 2007년 6월 발효)과의 FTA동맹이 출범했고, 미국 인도 EU 등 거대 경제권과도 속속 FTA 협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걸프협력회의(GCC) 캐나다 멕시코 등 6개국과 동시다발로 FTA 협상을 진행하고 있고, 일본 중국 등도 대기 중이다.
다른 나라들도 FTA동맹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세계 각국이 FTA 전쟁에 뛰어드는 불씨를 제공한 미국은 현재 한국, 파나마, 콜롬비아와의 FTA 의회 비준을 기다리고 있다.
자유무역을 적극 옹호하며 지난 8년간 10개국과 FTA를 발효시켰던 조지 부시 행정부에 비하면 오바마 행정부는 FTA에 소극적일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지만, 현재 아세안 등과 얘기가 오가는 등 계속해서 FTA를 확대하는 모습이다.
EU도 최근 경제위기 해법으로 FTA를 꼽으면서 특히 아시아권에 공을 들이고 있다. 현재 메르코수르 GCC 아세안 등 지역경제공동체와 협상을 벌이고 있고, 싱가포르 태국 말레이시아와도 협상 진행을 검토 중이다.
일본과 중국도 아시아 역내에서 벗어나 중남미 중동 지역으로 FTA동맹을 넓혀가는 추세다. 일본은 GCC 스위스 인도 호주 등과, 중국은 GCC 남아프리카관세동맹 아이슬란드 호주 등과 FTA 협상을 벌이고 있다.
세계 각국의 FTA 타깃도 시장이 큰 거대경제권이나 지리적으로 가까운 주변국에서 역외의 경제적ㆍ정치적 요충지로 옮겨가고 있는 단계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FTA 추진 대상국이 주변국에서 벗어나 타대륙 국가로 확대되고 있고, 최근에는 에너지 및 자원협력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자원 부국과의 FTA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석유자원이 풍부한 GCC에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중국 인도 아세안 호주 메르코수르 등이 경쟁적으로 FTA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문향란 기자 iami@hk.co.kr
■ 개별기업 FTA 활용 사례
자유무역협정(FTA)이 국가 경제 차원의 얘기만은 아니다. 개별 기업들에게도 원가를 절감하거나 수출을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이미 발효된 칠레, 아세안(ASEAN), 싱가포르 등과의 FTA를 적극 활용해 톡톡한 성과를 거둔 기업도 적지 않다. 앞으로 유럽연합(EU), 미국 등 거대 경제권과의 FTA가 발효된다면, 이런 성공 사례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화장품 업체 더페이스샵코리아는 2007년 6월 한국과 아세안의 FTA 상품협정이 발효된 이후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으로 완제품 및 반제품을 생산하는 국가를 당초 일본에서 아세안 소속인 태국으로 변경杉?
이 제품을 아세안 국가에 판매하는 경우 지금까지는 원산지 기준이 충족되지 않아 8%의 관세를 물어야 했지만, 변경 후에는 역내산으로 인정받아 관세를 한 푼도 물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 측은 클렌징폼 품목에서만 연간 6억원 가량의 관세 인하 효과를 볼 것으로 추산했다. 이노센트가구 역시 한ㆍ아세안 FTA 상품협정 발효 뒤 완제품 수입선을 중국(관세 8%)에서 베트남으로 전환하면서 제품 가격을 10% 가량 내릴 수 있었다.
합판 생산업체인 이건산업은 다른 국가들 간 FTA를 적극 활용해 성공한 케이스. 이 회사가 안정적인 원목 조달 목적으로 칠레에 '이건라우타로'라는 현지법인을 설립한 것이 1993년. 하지만 불과 몇 년 뒤 국내에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합판 수요가 급감했다. 돌파구가 절실했던 그 즈음 칠레가 멕시코를 시작으로 유럽연합(EU), 미국 등과 차례로 FTA를 체결한 것이 기회가 됐다.
국내 본사에 합판을 공급하는 대신 현지공장을 설립해 칠레가 FTA를 체결한 국가들에 수출하는 것으로 전략을 180도 수정한 것. 기획재정부 FTA국내대책본부 관계자는 "경쟁국인 중국, 말레이시아 등은 FTA 체결이 안 된 국가들이어서 상당한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10년 전 722만달러에 불과했던 현지법인 매출은 지난해 4,200만달러로 불어났다.
백합 생산업체 제주플라워는 한ㆍ칠레 FTA를 활용한 사례. 회사 측은 당초 4~8%의 높은 관세를 물며 네덜란드에서 화훼 구근(알뿌리)을 수입하다 FTA 발효 후 수입선을 칠레로 바꿨다. 칠레산 구근 가격이 네덜란드산보다 10% 이상 비싸고 운임 역시 60% 가량 더 들지만, 관세 효과를 감안하면 구근 1개당 16원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 FTA 효과/ 對칠레 수출 6배 폭증, 국내농가 피해는 미미
한ㆍ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이 상당한 주목을 받았던 건 우리나라 '1호 FTA'였기 때문이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두려움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한ㆍ칠레 FTA가 발효(2004년 4월 1일)된 지 올해로 5년째. 하지만 기대했던 것만큼의 엄청난 효과도 없었고, 우려했던 것만큼 피해도 크지 않았다. 'A'학점까지는 아니지만 'B'학점 정도의 무난한 평가가 주를 이룬다.
역시 FTA 체결은 양국간 교역 확대로 이어졌다. 2003년 5억1,700만달러에 불과했던 대 칠레 수출은 지난해 30억3,200만달러로 6배나 폭증했고, 이 기간 칠레로부터의 수입도 10억5,800만달러에서 41억2,700만달러로 4배 가량 늘어났다.
발효 초기에만 해도 수출보다 수입이 훨씬 빠르게 늘어나면서 무역수지 적자에 경고등이 켜졌지만, 2006년을 정점으로 적자 규모가 점점 축소되고 있다. 특히 승용차의 경우 2003년 수출액이 1억1,689만달러에 불과했지만 작년에는 5억2,542만달러로 늘어나면서 일본 자동차를 제치고 수입 자동차 1위에 올라섰다.
반면 칠레산 농산물 수입에 따른 국내 농가 피해는 비교적 제한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기획재정부는 22일 'FTA 추진 현황 및 기대효과' 자료에서 "칠레산 포도 수입 증가에도 불구하고 국내 포도가격, 시설포도 생산량 및 재배면적은 안정적 수준을 유지했다"며 "국내 포도 비수확기인 겨울철에 수입이 집중되기 때문에 노지포도와 직접적 대체관계에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올해로 발효 3년째를 맞는 한ㆍ싱가포르 FTA도 큰 탈없이 연착륙에 성공했다는 평가다. 체결 당시만 해도 고도로 개방된 경제체제를 가진 싱가포르에 일방적으로 유리할 수 있다는 우려가 많았지만, 오히려 무역수지 흑자폭은 2005년 20억8,900만달러에서 지난해 79억3,100만달러로 4배 가량 확대됐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우리나라로선 수출 증대 효과가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협상 과정에서, 또 협상 이후 어떻게 부작용을 최소화 하느냐다. 한ㆍ칠레 FTA의 경우 규모가 작아 피해도 미미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한ㆍ미 FTA나 한ㆍEU FTA는 득이 큰 만큼 실도 엄청나게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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