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불안과 긴장으로 몰아가던 북한 발 험한 뉴스가 요즘에는 뜸하다. 일시 소강상태에 들어간 요즘 장마 날씨를 닮았다고나 할까. 핵ㆍ미사일 실험을 계속하겠다는 북한의 강경한 자세와 유엔안보리 결의 1874호로 대표되는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압박이 맞부딪혀 형성된 한반도 정세 기상도는 여전해 언제 다시 천둥치고 폭우가 쏟아질지 불안하다. 그러나 이 소강상태를 틈타 대북 협상과 대화의 햇살이 비치고 있어 한반도 안보장마 끝을 조심스럽게 기대해볼 만도 하다.
'포괄적 패키지'에 거는 기대
대북 포괄적 패키지라는 협상의 햇살은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의 방한 보따리 속에서 삐져 나왔다. 완성품은 아니지만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되돌릴 수 없는(irreversible) 방식으로 포기하면 북미관계 정상화를 포함한 정치적ㆍ경제적 상응조치를 제공한다는 대북 빅딜 구상이라고 한다.
청와대는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달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먼저 제안했다며 포괄적 패키지의 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모양이다. 잘은 모르나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닐 것이다. 포괄적 패키지와 정부의 대북정책인 '비핵 개방 3000'의 발상이 매우 닮았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경제지원 면에서는 포괄적 패키지와 '비핵개방 3000'이 중첩된 부분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먼저 제안했다며 성급하게 공치사의 판을 벌일 때는 아니다. 북한의 수신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띄워 보냈던 '비핵개방 3000'이 북한의 비핵화 개방을 유인하기는커녕 남북관계를 경색시키는 역효과만 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실 포괄적 패키지도 새로운 접근은 아니다. 구체적 달성 목표만 놓고 보면 6자회담의 9ㆍ19공동성명에 다 들어 있는 내용이다. 목표지점까지 가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그동안 6자회담 참가국들이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원칙 아래 부분적ㆍ단계적 접근을 했다면 이번에는 북한과 나머지 참가국들이 취해야 하는 조치를 한 방에 끝내자는 구상이다.
2ㆍ13합의와 10ㆍ4 합의 등 세부 로드맵에 따른 단계적 접근은 행동 대 행동에 대응한 조합 짜 맞추기 과정에서 지리한 밀고 당기기로 시간과 인내심을 소진했고, 약속 불이행과 불능화 역주행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포괄적 패키지로 핵과 미사일 폐기의 핵심에 접근해야 한다는 발상이 나온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6자회담 참가국들이 당초 단계적 접근법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배경을 되돌아 보면 일은 간단치 않다. 북한이 핵을 폐기하고 그 대가로 체제 보장 및 경제지원을 받는 협상에는 심각한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핵은 한 번 완전 폐기하면 복원하기 어렵지만 국교 정상화 등을 통한 체제 보장이나 경제지원 약속은 언제든 뒤집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피차 신뢰 구축이 안된 상태에서 이 비대칭성에 따른 북한의 불안을 진정시키며 협상을 진행하기 위해 단계적 접근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단계적 접근은 행동 대 행동의 상응조치라는 벽돌에 신뢰의 모르타르를 발라 차곡차곡 쌓아 올려 북핵 폐기라는 완성된 건물을 짓고자 했다. 그러나 신뢰 모르타르의 점성 부족으로 공들여 쌓았던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꼴이다.
급한 과제는 남북 신뢰 회복
그렇다고 해서 벽돌과 다른 건축 자재를 한꺼번에 쏟아 붓는다고 번듯한 건물이 지어질 리는 없다. 포괄적 패키지로 북핵과 미사일 폐기를 단번에 이끌어 내려면 단계적 접근보다 훨씬 더 고난도의 기술과 끈끈한 신뢰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난점들을 극복할 방안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포괄적 패키지는 '비핵개방 3000'이 그랬듯이 북한에는 또 다른 압박책으로 비칠 개연성이 높다. 우리 정부가 교착상태에 빠진 북핵 문제의 돌파구를 찾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은 필요하고도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말로 앞서기보다는 조용하게 남북간 신뢰를 회복해 나가는 것이 더 급하다. 미국 일본과의 공조도 필요하지만 강력한 대북 지렛대를 갖고 있는 중국과 눈높이를 맞추는 것도 서둘러야 한다. 장마기간 모처럼 드러난 한반도 푸른 하늘에 다시 긴장의 먹장구름이 몰려오기 전에.
이계성 논설위원ㆍ한반도평화연구소장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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