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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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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요

입력
2009.07.21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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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는 못된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그 생각이 강박적인 것이라고 진단하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판단할 때면 으레 그 잣대가 등장했습니다. 저는 제가 스스로 마련한 그 잣대가 옳다고 여겼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 자신에게 그 잣대를 들이댔을 때 온전하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 모자람 때문에 더 그 잣대에 집착해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했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게으름'입니다.

이를테면 아침에 늦잠을 자는 것은 제게는 게으름의 전형입니다.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밥을 먹고 즉시 설거지를 말끔히 하지 않는 것도 제게는 견디기 힘든 게으름입니다. 이러다 보니 나중에는 별별 것을 다 게으름을 잣대로 측정하곤 했습니다. 학생들에게서 도대체 그것이 무어냐는 항변을 거칠게 받은 적이 있습니다만 '정답이지만 게으른 답안이어서 만점을 줄 수 없다'는 것도 그 하나입니다. 교과서에 있는 내용이나 강의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성실한 답안'을 저는 '게으른 답안'이라고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을 꽤 살다 보니 고정관념이란 것도 서서히 제 풀에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늦잠을 잘 수밖에 없는 사정이 두루 보입니다. 늦잠이 게으름일 수는 없다는 것을 저도 모르게 승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여전히 게으름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일컬어 '게으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약속시간 못 지키는 것, 설거지 나중에 하는 것도 다 그럴만한 사정이 없지 않다는 것이 이제 겨우 읽혀집니다. 평가 척도와 상관없이 답안지마다 특성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게으른 답안지라고 화를 낼 답안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슬그머니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게으름이라는 것이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조차 하게 됩니다. 부지런함만으로 삶이 흐른다면, 그래서 가빠지는 숨 때문에 언젠가는 더 이상 숨 쉴 겨를도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면, 이윽고 숨이 막혀 털썩 쓰러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게으름 예찬론자'로 탈바꿈한 것으로 짐작하실지 모르겠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게으름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늦잠은 게으름이고, 정답이지만 게으른 답안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달라진 것은 이전의 게으름의 범주에 들어있던 많은 것들이 이제는 그 울을 벗어나 다른 언어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이전에는 '게으름'만으로 꽉 차있던 제 관념 속에 느긋함, 넉넉함, 여유, 심지어 성숙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스스럼없이 들어가 제각기 자기 자리를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게으름 예찬론자가 된 것이 아니라 이제야 겨우 게으름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제 고정관념의 이러한 완만한 변용(變容)이 제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옳고 그름의 준거가 흐려지고, 그래서 판단이 불분명한 채 어떤 일도 제대로 결정을 하지 못하게 되고, 너그러운 듯해도 결과적으로는 무책임한 태도를 일상화하는데 이른 것이라고 보면 제 변화는 아주 못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이 들면서 흐물흐물 허물어지는 추한 모습이 바로 이러한 것일 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칙과 분명한 준거를 지니고 산다는 것이 실은 자기 방어적인 유치한 본능을 정당화하는 것일 수 있고, 인식 이전의 설명할 수 없는 신념에 의한 배타적인 독선일 뿐이며, 그래서 결과적으로 내 인식과 판단과 실천이 나 아닌 모든 존재들에게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폭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일 수 있다고 한다면 제 변용은 여간 다행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비로소 세월을 살면서 나이 값을 하게 된 성숙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관념이 실은 병리적인 것이었다는 것, 곧 내 의도와 상관없이 내 의식이나 표상에 거듭 떠올라 내 이념과 인식을 지배하고 행동에 영향을 미친 고착된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게으름이라는 고정관념에서 서서히 풀려나는 일이 제 성숙인지 아니면 퇴행인지 잘 분간이 되기도 전에 게으름과 다르지 않게 온갖 고정관념들이 똬리를 틀고 제 안에서 머물고 있다 게으름이 모호해지는 틈에 끊임없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양비론(兩非論)이나 양시론(兩是論)도 그 하나입니다.

저는 이도 저도 다 옳다든지 옳은 측면이 있다든지 하는 양시론이나 양쪽이 모두 그르다든지 그른 측면이 있다고 하는 양비론을 주장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쪽이 옳으면 옳은 거고 그르면 그른 것이지 그러한 모호하고 애매한 인식이나 태도로 산다는 것은 비겁할 뿐만 아니라 예상 가능한 피해에서 간교하게 도피하려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덕스러움을 가장한 책임 면피용 궤변쯤으로 여긴 것입니다. 더구나 모두가 수긍하는 대안을 뚜렷하게 제시하지 않고 그러한 '설명'을 하는 경우는, 그것이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발언되는 것 자체가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도 세월 탓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러한 생각이 고정관념의 틀을 서서히 벗어나 제 인식이나 실천의 잣대가 되기보다 사색이나 고뇌의 내용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양비· 양시론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진술일까? 오히려 그러한 논의야말로 사물의 인식과 판단을 위한 전제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이에 대한 부정적 비판은 그 양비· 양시론을 거친 귀결로 발언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고 이 논의를 건너뛰어 이른 질타라면 그 비난의 논거는 과연 무엇인가? 이러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면서 양비· 양시론은 그릇된 것이라는 제 고정관념을 흔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제 삶의 정황이 절박하지 않아 이러한 관념의 유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사실을 감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고정관념이든 삶의 지평이 넓게 보일수록 그에 따라 완만한 흔들림을 겪는다는 것, 그리고 그 흔들림의 승인도 분명한 하나의 선택이고 결단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제 못난 소치인지 모릅니다. 오히려 세월 따라 고정관념이 불변하는 신념으로 상승하고,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지엄한 당위라고 증언하는 분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요.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요.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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