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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쇠귀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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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쇠귀나물

입력
2009.07.21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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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이 버려진 논물 위로

소의 귀 모양을 한 풀잎들이 나와

아, 아, 아, 입을 갖다 대며 쭈그리고 앉아 놀던 학교 길

손을 묻어 물을 만지면 곰지락거리는 소녀가 느껴졌다

막 뜯은 편지 봉투처럼 가난한 마음을 들고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나 배배 꼬인 연애를 하러 가던

누나는 중학교밖에 못 마치고

쇠귀나물 뽑힌 논에서 모를 심었다

쇠대나물 쇠태나물 쇠택나물 수사 곡사 급사 택사 물택사

버려지면 이름도 아무렇게나 불린다

물집 잡힌 하얀 꽃잎 우리 누나

중퇴한 교실 창 안에 대고 친구들에게 뭐라고 했나

쇠귀에 뭐라고 했나

소리치고 밀쳐도 남자는 꿈쩍을 않고

세상에 골똘해야 하는 일을 쇠귀에게 속삭이는 일로 알았던

유리병 안에 들어간 나비가 팔랑거린다

쇠귀나물 잎 떨어진 자리가 구드러지고 있다

● 시인이 '버려지면 이름도 아무렇게나 불린다'라고 말할 때 나는 마음이 아프다. 시인이 논 언저리에 앉아 논물에 버려진 유리병을 바라보며 굴곡 깊은 누이의 생애를 추억하는 모습이 떠오를 때 나는 마음이 아프다.

어떤 가족사에도 다른 식구의 등을 할퀴고 가버린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다. 그 누군가를 생각하는 일은 사실은 이 드난한 세상을 비비며 살아가는 내 생애를 반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쇠귀나물의 다른 이름들을 불러보면서 어떤 식구의 드난했던 생애를 반추할 때,

문득 나의 생애도 시인이 불러보는 쇠귀나물의 다른 이름이 되어있는 것이다. 잎이 소의 귀를 닮았다고 해서 쇠귀나물이라고 불리우는 이 풀이 하얀 꽃을 피울 때 그리고 그 꽃잎이 논물에 버려진 유리병 안으로 들어가 나비가 될 때 누추한 우리의 생애도 유리병 속에서 팔랑거리는 것이리라.

허수경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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