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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3> 초등학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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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3> 초등학교 시절

입력
2009.07.21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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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 강신용(1895~1984)은 서당이나 학교교육을 받은 일이 없었으나 매우 따뜻하고 후덕한 분이었다. 시어머니의 시집살이와 남편의 냉대가 있었으나 이를 불평하는 일이 없었으며 늘 자기가 잘못하고 부족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늘 남을 칭찬해 주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분이었다. 아버지가 일을 못하는 반거충이였기 때문에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느라 고생이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보리방아 찌어 놓고 낮에는 논과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길쌈을 하는 것이 평상시의 일과였다. 어머니는 비교적 장수 하셔서 서울에서 약 20년을 지내다가 돌아 가셨다.

나는 1942년 여섯 살 때 백석초등학교에 입학 했다. 학교는 마을에서 1km 될까 말까 하는 거리에 있었으며 매 학년 1학급씩 이었고 한 학급은 남녀 합해 약 60명이었다. 간단한 면접시험을 거쳐 선발했는데 보통 나보다 두세 살 많았으며 다섯 살 위인 사람도 있었다.

당시 일제치하에서 학교에서는 매일 신사참배를 하고 방과 후에는 퇴비생산, 소나무의 송진채취, 방공훈련 등에 동원되고 친구들과는 병정놀이와 새끼로 만든 공으로 축구를 즐겨했다. 43년이던가. 말레이시아를 점령했다고 고무공 하나씩을 나누어 주어 좋아 했던 기억이 있다. 결식아동이 많아 학교에서는 쌀겨 빵과 수수 빵을 점심때 나눠 주었다.

우리말 말살정책을 추진하던 일제는 우리에게 매달 일정수의 표 딱지를 나누어 주고 우리말을 하면 이를 지적하는 사람에게 한 장씩 내 놓도록 해서 이것을 국어 성적에 반영하여 서로가 우리말 하는지를 밝혔던 기억이 있다.

나는 자라면서 다른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구슬치기 자치기 딱지치기 못치기 제기차기 등을 많이 했다. 종이 딱지나 유리구슬이 왜 그리 값진 것으로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여름에는 마을 옆 방죽에서 멱을 감고 잠자리도 많이 잡았다.

한 번은 학교에서 오는 길에 멱을 감고 나와 보니 책보자기와 옷이 없어져서 발가벗은 채 집에 뛰어 왔던 기억이 있다. 겨울에는 친구들과 토끼몰이를 하고 논에서 썰매를 즐겨 탔다. 야산에는 토끼들이 많아 눈이 많이 온 날 토끼를 몰면 잡히는 수도 있었다. 썰매는 판자에 철사를 고정시켜 앉아서 타는 것인데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바나나는 구경조차 한 일이 없지만 사이다는 마셔본 일이 있고 감귤도 한번 먹어 본 일이 있는데 세상에 이런 것도 있는가 싶었다. 내게 만만한 군것질 깜은 두 그루의 감 나무였다. 나는 늘 자고 나면 감나무 밑으로 가서 떨어진 감을 주어먹었는데 이것이 큰 재미였다. 그런데 한 번은 아주 맛있게 생긴 감이 개 똥 바로 옆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꺼림칙해서 먹을 수가 없고 그렇다고 버리기는 아까워 결국 어머니에게 드리기로 했다. 어머니는 이렇게 좋은 감은 네가 먹으라고 극구 사양하셔서 나는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더니 웃으면서 받으셨는데 이것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 때 일을 생각할 때마다 부모의 자식사랑과 자식의 부모 사랑은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되새기곤 한다.

4학년 되던 해에 해방이 되었다. 그 때 우리 국민들의 환희와 사회적 혼란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때 신문을 보면 도매물가가 여섯 달 동안에 17배가 올랐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 선생님이 가시고 우리나라 선생님이 오셨는데 그때의 담임이었던 김길수 선생님이 지금도 건강하게 고향을 지키고 계셔서 가끔 찾아 뵙고 있다.

이 무렵부터 나는 농사일을 돕기 시작 했다. 가을에 들판에 나가 새 떼를 쫓는 '새 보기'는 늘 내 담당이었다. 남들은 논에 원두막을 짓고 논 구석구석을 새끼줄로 연결해서 비교적 편하게 새 보기를 했는데 우리 집은 소나무만 한 그루 논두렁에 꽂아 주었다. 그래서 그늘의 위치가 시시각각으로 바뀔 뿐 아니라 새가 앉을 때 마다 달려가야 하기 때문에 불편이 많았다. 그렇지만 옥수수나 단수수를 싸 들고 나가 친구들과 상수리치기나 구슬치기를 하면서 새를 보는 것은 싫지 않았다.

그리고 부모님을 도와 모 심는 일, 김매는 농부들의 뒤에서 넘어지는 모를 일으켜 세우는 일, 벼 베는 일, 그리고 밭에서 보리와 콩을 심고 거두는 일 등을 했다. 그리고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솔가리를 긁어 오는 일, 풀을 뜯고 추석 무렵 조상의 묘 벌초하는 일도 내가 해야 하는 일 이었다. 이렇게 나는 어려서부터 쟁기질을 제외한 모든 농사일을 배우고 또 잘 해냈다.

백석초등학교는 그 당시의 목조건물을 헐고 70년대에 콘크리트 건물을 지었는데 작년에 그 건물을 다시 헐고 현대식 새 건물을 준공했다. 그러나 한 때는 전교생 500명이 넘던 학생 수가 지금은 모두 합해야 50명이 될까 말까 하여 황폐화 하고 있는 오늘 날의 농촌현실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학교에 장학금을 보내왔으며 지금도 시간 되는대로 이 학교를 둘러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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