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 버스에서 일어나야 하나"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어머니1955년 백인에 자리양보 거부 '불법' "인간으로서 내 권리를 알고 싶었다"버스 보이콧 운동, 흑백분리 폐지 성과, 미국 인권침해 세계에 알린 상징으로
1955년 11월 1일은 목요일이었다. 미국 앨러배머주 몽고메리시의 한 버스정류장에서 42세의 흑인 여성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는 그녀의 이름은 로자 파크스였다. 로자는 몽고메리 페어 백화점 점원이었다. 오후 6시가 좀 넘어 클리블랜드 애비뉴행 버스가 왔고, 그녀는 버스삯을 낸 뒤 '흑인석'의 맨 앞줄 빈 의자에 앉았다.
1900년 몽고메리시는 버스 좌석에서 흑백 분리를 허용하는 시 조례를 통과시킨 바 있다. 반세기가 지난 뒤 이 조례는 미합중국 헌법에도, 대부분의 주(州) 법률에도 위배되는 것이었지만 몽고메리에서는 관습적으로 지켜지고 있었다. 이 조례에 따르면 버스 기사나 차장은 (흑인) 승객이 앉아야 할 자리를 지정하거나 자리에서 일어서게 할 수 있었다.
버스가 엠파이어 극장 앞에 섰을 땐 빈 자리가 없었다. 백인 승객 몇 사람이 버스에 올랐다. 빈자리가 없었으므로 그들은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버스 기사 제임스 블레이크는 관례에 따라 로자 파크스를 비롯한 흑인 네 명에게 자리에서 일어서줄 것을 요구했다.
다른 세 사람은 일어났으나 로자 파크스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뒷날 이 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백인 운전기사가 우리에게 다가와 손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명령했을 때, 나는 어떤 확고한 결단이 겨울밤의 이불처럼 내 몸을 덮어주는 것을 느꼈다." 파크스가 일어나지 않자, 기사는 입을 열어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어서서 그 자리를 내놓는 게 좋을 거요. 일어나지 그래요?" "내가 일어나야 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두 사람 사이에 말싸움이 시작됐다. "내가 왜 이 자리에서 움직여야 하죠?" "만약에 당신이 일어서지 않으면 내가 경찰을 불러서 당신을 체포하게 할 테니까요." "그러도록 하시구려."
파크스는 또 다른 인터뷰에서 그 때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는 단 한번만이라도 내가 인간으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어떤 권리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백인 운전기사는 자기가 한 말을 지켰다. 경찰관이 와서 그녀를 하차시켰다. 그녀가 경찰관에게 물었다. "왜 당신들은 우리한테 이렇게 매정하죠?" 그녀가 기억하고 있던 경찰관의 대답은 이랬다.
"나도 몰라요. 그렇지만 법은 법이니까요. 그리고 지금 당신은 체포된 상태입니다." 그랬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그녀가 체포됐다는 사실뿐이었다. 그 때 그녀는 결심했다. 다시는 이런 굴욕감을 느끼며 버스를 타지 않겠다고.
파크스는 몽고메리시의 흑백인종분리법 위반으로 기소돼 벌금 10달러와 소송비용 4달러를 내야 했다. 이 재판과 판결에는 사실 우스운 면이 있었다. 흑백인종분리법에 따르더라도, 흑인 승객이 흑인용 승객을 백인 승객에게 양보할 의무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1950년대 미국 남부 상황이었다. 각 지방자치단체의 조례가 아니더라도, 소위 '짐 크로우 법'이라는 것에 따라 남부의 일상생활은 흑백으로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것은 특히 대중교통 수단에서 두드러졌다. 모든 버스가 흑인칸과 백인칸으로 분리되었다.
흑인 어린이들을 위한 스쿨버스는 전혀 운행되지 않았다. 백인 어린이들이 스쿨버스로 통학하는 그 길을 흑인 어린이들은 걸어 다녀야 했다.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 미국의 현실이었다. 흑인 시민들이 적잖이 눈에 띄던 당시의 유럽 도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리를 옮기라거나 일어서라는 버스 기사의 요구를 거절한 흑인이 로자 파크스가 처음은 아니었다. 1944년에는 육상 선수 재키 로빈슨이 텍사스의 포트 후드에서 한 육군 장교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1946년에는 이렌 모건이, 1955년에는 새러 루이스 키스가 주간(州間) 운행 버스에는 흑인칸과 백인칸을 따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연방대법원에서 받아냈다.
파크스가 버스기사의 요구를 거절하기 아홉 달 전에는 클로뎃 콜빈이라는 15세 소녀가, 몽고메리에서, 파크스와 똑같은 방식으로,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운전기사의 요구를 거절해 수갑을 찼다.
부커 워싱턴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클로뎃 콜빈은 자신의 헌법적 권리가 침해됐다고 주장했다. 그 당시 클로뎃은 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 청소년부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로자 파크스는 이 민권운동단체의 자문위원이었다.
NAACP 본부는 뭔가 행동에 들어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클로뎃 콜빈은 운동의 상징이 되기에 불리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미성년자로서 임신상태였던 데다가 몇 차례 경범죄를 저질렀던 터라 인종주의자들의 공격거리가 되기 쉬웠다.
그러던 중 로자 파크스 사건?터졌다. 로자 파크스는 흑백분리에 저항하는 운동의 이상적 상징이 될 만했다. 그녀는 안정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고, 직장이 있었으며, 예절발랐고, 정치감각이 있었다.
그녀를 상징으로 삼아 저 유명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이 일어났다. 몽고메리지위향상협회(MIA)의 대표로서 이 운동을 이끌며 흑인민권운동의 신예로 등장한 마틴 루터 킹은 로자 파크스를 "몽고메리의 가장 훌륭한 흑인시민이 아니라 몽고메리의 가장 훌륭한 시민"이라고 찬미했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매주 월요일마다 모든 흑인들이 버스를 타지 말자는 것이었다. 하루쯤 일을 쉬더라도, 하루쯤 학교를 쉬더라도 말이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택시를 타거나, 걷더라도 버스는 타지 말자고 MIA는 흑인들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흑인들은 그 호소에 응했다.
흑인들끼리의 카풀이 실천되고 버스요금만큼만 요금을 받는 흑인 운영 택시들이 등장했다. 4만에 가까운 흑인 노동자들이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어떤 이들은 월요일마다 30km 이상을 걷기도 했다. 보이콧이 계속되는 동안 로자 파크스는 '불법' 보이콧을 조직했다는 죄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버스회사에 큰 타격을 입혔다. 버스 승객의 75% 가량이 흑인이었으므로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보이콧은 381일간 계속되었고, 월요일에는 운행을 하지 않는 버스회사들이 늘어났다. 아쉬운 쪽은 백인사회가 되었고, 버스회사 경영자들은 위기를 느꼈다.
1956년 6월 19일, 지방법원은 흑백분리를 규정한 몽고메리시의 조례가 흑인들에게서 법의 공평한 보호를 박탈함으로써 수정헌법 14조를 위반하고 있다고 판시했고, 그보다 넉달여 뒤인 1956년 11월 3일, 미국 연방 대법원은 주내(州內)를 운행하는 버스에서도 흑인석과 백인석을 나누는 것이 위헌이라고 판시했다.
마침내 몽고메리의 백인사회가 백기를 든 것이다. 흑백 분리를 폐지하라는 법원 명령은 12월 20일 몽고메리에 도착했다. 버스보이콧운동이 몽고메리에서 끝난 것은 그 이튿날이었다.
그러나 백인사회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흑인교회들이 공격당해 불타고, 마틴 루터 킹을 포함해 보이콧 지도자들의 집에 폭탄이 날아들었다. 로자 파크스는 백화점에서 해고되었고, 그녀의 남편 레이먼드도 주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러나 로자 파크스는 버스 보이콧에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미국의 흑인들이 당하고 있던 인권 침해를 세계에 널리 알렸고, 민권운동의 한 상징이 되었다.
오늘날 로자 파크스는 미국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2005년 10월 24일 그녀가 92세로 타계하자, 미국 양원은 그녀의 유해를 의사당 건물 로턴더(원형 홀)에 '명예안치'하자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것은 프랑스인들이 파리 팡테옹에 묻히는 것에 비교될 만한 영예였다. 조국의 위대한 인물을 의사당 로턴더에 모시는 것이 관행이 된 1852년 이래 파크스는 그 곳에 명예안치된 31번째 사람이었다.
여성으로는 처음이었고, 정부 관료가 아니었던 사람으로서도 처음이었다. 11월 2일 일곱 시간 동안 계속된 그녀의 영결식은 거의 국민장이라 할 만했다. 당시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이 날 국내외 모든 미국 공공건물에 조기를 달라고 명령했다.
생애 후반에 로자 파크스는 갖가지 영예를 누렸다. 1996년 당시 대통령 빌 클린턴에게서 받은 대통령자유메달(미국 행정부가 헌정할 수 있는 최고의 명예다)을 비롯해 그녀가 국내외 여러 단체에서 받은 상은 셀 수 없이 많다. 값지게 천수를 누렸다 할 만하다. 그 값진 천수의 시작은 그녀가 죽기 반세기 전에 자신을 체포한 경찰관으로부터 들은 말일 게다.
"나도 왜 당신을 체포해야 하는진 모르겠어요. 하지만 법은 법이니까요." 로자 파크스는 그 법을 어김으로써 진정한 법치를 이룬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 되는 걸 그녀가 보고 죽었으면 좋았으련만.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