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형편이 많이 힘들어지면서 이전에는 하찮게 느껴졌던 동전들도 지폐만큼의 가치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떨어진 동전을 보고서도 줍기 귀찮아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습니다. 전에는 마트나 백화점에 가면 일단 맘에 드는 스타일부터 고르고 나서 가격을 살폈는데, 지금은 백화점에 오래 머물면서 일일이 가격을 비교해보고 망설이는 아내의 심정을 알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점심까지도 덜었습니다.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자니 마땅히 먹을 곳도 없는데다 애들에게 이리 저리 치이기 십상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처남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새벽에야 돌아오는 아내에게 살림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점심을 편의점 컵라면으로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주먹만큼도 양이 안 되는 컵라면 하나 먹어봤자 간에 기별도 안 갔지만 내가 한 끼만 참으면 큰 놈 영어학원비라도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에 버텼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집에 가서는 두 끼 분량을 한꺼번에 뱃속에 쏟아 붓다시피 했습니다. 그런 제게 아내가 "뱃속에 돼지가 들어 있느냐?"고 핀잔했습니다. 힘든 상황을 버티며 쌓이는 스트레스로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던 저는 그 순간 아내에게 불만을 다 쏟아내 버렸습니다.
"내가 또 주식에 미쳐서 점심시간을 그냥 흘렸는지 알아? 하루 4,000원 점심 값 아껴서 애 학원비 마련하려고 일부러 굶었어. 뭐 당신 밥이 맛있고 반찬이 좋아서 그렇게 먹는 줄 알아? 아침 먹고 지금까지 굶어봐. 내가 밥솥에 얼굴을 파묻고 바닥에 떨어진 밥알 한 알까지 다 주워먹는지 그 심정을 알 거야. 집에서 살림만 하니 내 마음을 알 턱이 있나, 에이…!"
아내 마음에 화살을 날린 뒤 숟가락을 던지고는 돌아섰습니다. 방에 들어오니 제대로 받아오지 못하는 남편 월급에 저 이상으로 고통 받는 아내에게 너무 심하게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다 쏟아낸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이튿날 귀가했는데 저녁 반찬이 훨씬 풍족해 보였습니다. 아내는 그 동안 "먹는 거 조금 줄이고 아낀다고 굶어죽지 않는다. 적게 먹어야 살도 빼고 오래 산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식탁 반찬에 참 인색했었지요. 그런데 전날 제가 했던 말이 가슴에 맺혔는지 요즘 들어 거의 자취를 감췄던 생선도 듬뿍 올려져 있었죠.
그걸 보고 더 자책했습니다. 아내는 전날 제가 했듯 "당신이 월급 못 받으니깐 반찬이 이따위로 초라하지, 누군 요리할지 모르고 집에서 놀고 먹으면서 마음 편히 보내는지 알아?" 하며 따지고 들지않고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습니다. 화라도 냈다면 덜 미안했을 텐데 아내가 모든 잘못을 저지른 표정이어서 더 후회가 됐습니다.
그렇게 닷새 정도 지났을 때 아내가 점심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평소 내 일에 방해가 되기 싫다며 병원 갔을 때도 전화를 자제했던 아내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혹시 아직도 앙금이 남아있는지 불안했는데 잠깐 회사 앞으로 나와보라고 하더군요.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무조건 나오라고 하길래 정말 불안한 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글쎄, 아내가 제 손에 하루 식비 5,000원씩 정확히 주 5일 근무를 해결할 2만5,000원을 건네면서 "굶으면서 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굶고 일하면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점심 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 빨리 식당에 가라"며 바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때는 그 돈이 어떻게 마련됐는지도 모른 채 그저 '확실히 한 방 터트렸더니 효과만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알고 보니 아내는 회사 근처 족발집에서 양념 다듬는 일을 시작했던 겁니다. 그 집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지만 처음부터 제대로 돈 받는 것보다는 제 점심값을 해결해 주는 것이 목적이었던 아내는 시간당 보수를 5,000원에서 3,000원으로 줄여 받으면서 하루 2시간씩 일을 했습니다. 그리곤 자신의 차비 1,000원 정도를 빼고는 모두 저한테 전달한 것이었습니다.
그냥 집에서 놀지도 않고 밤부터 새벽까지 일하는데 제 점심 때문에 잠깐의 잠과 휴식마저 포기한 채 추가로 일을 한다는 말을 처남에게 전해 듣고는 땅이라도 파서 숨고 싶었습니다.
그때 내가 입 방정만 떨지 않았더라면 아내가 달콤한 낮 휴식마저 포기하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 저 때문에 아내는 하루 5시간도 못 잡니다. 바로 아내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당장 일을 포기하라"고 종용했지만 아내는 조용했던 그때와 달리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지금 회사 사정이 나빠 당신 주머니가 많이 어렵고 마음도 복잡할 텐데…, 죽을 때까지 이렇게 고생하지는 않을 테니 당분간만 내게 맡겨달라"고 했습니다. 또 "평소 당신이 내 발을 '족발'이라고 하지 않았어? 아?친숙한 음식을 만져서 전혀 힘들지도 않은데다 하루 2시간만 더 일하는 것이라 괜찮아"하며 한 숨 대신 웃음을 보여줬습니다.
다시 한번 만류하려 했지만 아내는 "그 일 얻어내려고 그 집에 가서 며칠을 졸랐는데 최소한 본전은 뽑아야 하지 않느냐?"며 "기왕 시작한 일, 이 다음에 혹시 족발집 차릴지도 모르니 배울 수 있게 잠시 지켜봐 달라"고 했습니다.
할 수없이 저는 더 이상 말을 않는 대신 아내의 고생을 더 가치 있게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편의점에서 파는 2,000원짜리 도시락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나머지 3,000원은 매일 은행에 찾아가 저축을 합니다. 그래 봐야 돈이 얼마나 모일지도 모르지만 사정이 좀 나아지면 여기에다 이자로 두 배를 더해서 아내에게 돌려주고 다시 고맙다고 말할 생각입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님이 점을 보실 때마다 "니 놈이 다른 복은 없지만 마누라 하나는 잘 만날 거다"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 말씀이 500% 이상 적중했습니다.
서울 성북구 정릉동 - 이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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