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7월19일 몽양 여운형 선생이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세단을 타고 계동 자택으로 귀가하던 중 극우단체 소속 청년의 흉탄을 맞고 쓰러졌다. 해방 후 중도연합에 기반한 통일민주국가 건설에 매진했던 몽양은 극우ㆍ극좌 세력의 공적이었고, 이들로부터 숱한 테러와 암살 기도에 시달렸다. 해방 후 3일째부터 시작해 두 달에 한 번 꼴로 테러를 당했고 결국 열 두 번째 테러에 희생되고 말았다. 백주에 그것도 파출소에서 50보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대로에서 벌어진 일이어서 암살범이 경찰의 비호를 받았다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 해방정국에서 중도좌파를 이끌었던 몽양의 암살로 그가 중도우파의 김규식과 함께 추진했던 좌우합작도 좌절되고 말았다. 일찍부터 일제의 패망을 내다보고 해방을 맞을 준비를 해온 몽양은 해방 직후 결성한 건준(조선건국준비위원회)을 기반으로 좌익세력과 연대해 인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미군정의 승인 거부로 독립정부 수립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몽양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에 따라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통일민주국가를 건설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좌익세력이 소련 지령에 따라 찬탁으로 돌아서기 전에 찬탁입장을 취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을 통한 민주적 통일정부 수립이 몽양의 당면 목표였다. 중도좌파와 중도우파의 연대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좌우합작운동은 당시 극우 및 극좌세력의 배제를 원했던 미군정의 뜻이기도 했다. 몽양은 김규식, 김구에 의해 남북연합이 추진되기 이전에 5차례나 북한을 방문, 김일성과 만났다. 그러다 보니 좌우 양 진영에서 각각 친미파, 친북공산주의자라는 공격을 받았으며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에도 시달렸다. 해방정국의 중도파 인사들은 모두 이런 공격과 비난을 받았고, 결국 암살되거나 정치적으로 도태되는 운명을 맞았다.
▦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중도 강화를 강조하고 나선 것을 계기로 몽양과 김규식 등 해방 정국의 중도파 운동을 되돌아 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당시 중도파가 추구했던 노선은 분단과 민족상잔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안이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몽양은 서거 58년 만인 2005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내일 서울 수유리 몽양 묘역에서 62주기 추모식이 열리고, 20일에는 몽양의 중도주의 등에 관한 학술토론회도 열린다. 남한사회의 좌우갈등 뿐만 아니라 남북 분단을 뛰어넘을 수 있는 중도의 길을 찾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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