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ㆍ상해 등의 혐의로 징역 10년이 확정돼 현재 안동교도소에 수감 중인 안모(43)씨. 피해자의 집 난간에서 그의 지문이 나왔고, 그의 집에서 범행에 사용된 것과 같은 종류의 흉기가 발견됐다는 것이 법원에서 유죄판결의 결정적 증거가 됐다.
그러나 확정 판결 이후 '범인은 무(無)정자증'이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의 감정결과가 나오면서 안씨에게 희망이 찾아왔다. 안씨는 무정자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죄의 명백한 증거가 나왔다"며 재심을 청구했다. 하지만 서울고법은 안씨의 재심청구를 기각했고, 안씨는 대법원에 항고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19일 무려 4년 만에 안씨의 재심청구에 대한 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법원은 "범인이 무정자증이라는 국과수의 의견은 '그렇게 추정된다'는 것이고, 가검물(可檢物)의 상태에 따라 정자가 소실될 수도 있는 만큼 반드시 범인이 무정자증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청구기각 이유를 밝혔다.
안씨는 "경찰이 '피해자 방(실제는 난간)에서 너의 지문이 나왔다'고 기망하고(속이고), '부인하면 강도까지 입건하여 보호감호를 받게 만들겠다'고 협박해 어쩔 수 없이 허위자백을 했었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재심의 범위에 대한 많은 논의를 담고, 일부 판례를 변경해 재심의 기준을 좀더 구체화했다. 형사소송법은 재심이 가능한 경우를 '무죄 등을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됐을 때'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번 판결에서 '명백한 증거'의 판단기준을 새로 정립했다.
대법원은 "새로 발견된 증거만을 독립적ㆍ고립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이미 확보된 증거들과 유기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고 모순된 것들을 함께 고려해서 평가해야 한다"며 "새로 발견된 증거의 증거가치만을 기준으로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인지 여부를 판단한 기존 판례는 변경한다"고 밝혔다.
결국 안씨는 국과수의 의견이 자신에 대한 유죄판결을 뒤집을 만한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했으나, 대법원은 변경된 판례를 적용해 다른 증거들과 함께 종합적으로 평가해 볼 때 그렇게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 재심(再審)이란
판결이 확정된 뒤 결론을 뒤집을만한 결정적 증거가 나올 경우 다시 재판을 받는 것을 말한다. 재심을 받으려면 형사 피의자는 재심청구를 해서 법원으로부터 재심개시 결정을 받아야 한다. 1심 판결이 잘못됐다면 재심은 1심부터 이루어지며, 항소심 판결이 잘못됐다면 항소심부터 이루어진다.
이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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