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에서 건너온 동그란 빵 하나가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번(Bun). 우유와 버터를 넣고 구운 작고 둥근 영국 빵을 이르는 말. 하지만 영국의 식민지였던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홍콩으로 건너가면 이 단어는 '커피로 코팅된 동그란 버터빵'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달콤하고 고소한 동남아식 번이 수많은 빵을 밀어내고 한국의 베이커리를 석권하고 있다. 2007년 론칭한 로티보이를 필두로 파파로티, 로티맘 같은 동남아 계열의 번 전문점들이 급속하게 퍼지기 시작하더니, 스타벅스나 엔젤리너스 같은 커피전문점은 물론 백화점과 호텔의 고급 베이커리에까지 번이 주요 메뉴로 등장했다.
조선호텔이 독점 계약한 200년 전통의 프랑스 정통 베이커리 달로와요가 카페번이라는 독립 매장을 운영할 정도. 지금 대한민국에서 '빵 중의 빵'을 묻는다면 대답은 바로 번이다.
■ 인기 비결은 강렬한 커피향
경북 포항에 사는 최명숙(63)씨가 번 마니아가 된 사연. 손자와 함께 동네를 산책하는데 갑자기 손자 녀석이 "아, 좋은 냄새가 나" 하며 코를 벌름거리더니 어느 가게로 냉큼 뛰어들어갔다. 바로 로티보이였다.
로티보이는 1998년 말레이시아에서 탄생해 현재 싱가포르에 인터내셔널 본사를 두고 있는 세계적 프랜차이즈로 국내에 처음으로 번을 소개했다. '로티'는 말레이시아어로 '빵'이라는 뜻.
번에 매혹된 사람들이 첫손에 꼽는 매력은 단연 향기다. 번은 속에 고소한 버터가 든 생지를 발효시킨 후 그 위에 커피크림을 토핑해 오븐에서 굽는데, 토핑이 녹아내려 빵을 갈색빛으로 코팅하면서 깊은 모카향을 풍긴다. 거기에 버터의 고소한 향까지 더해지면서 한번 냄새를 맡으면 그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든다.
이런 특징 때문에 번은 제조과정 자체가 중요한 마케팅 수단이다. 이른바 '향기 마케팅'으로, 번 매장이 제조 과정을 100% 오픈하고, 백화점 식품매장 한가운데 자리잡은 이유다.
■ 바삭하면서 부드러운, 달콤하면서 짭쪼름한
커피 메뉴가 고급화ㆍ다양화하면서 도넛처럼 커피와 함께 먹을 수 있는 달짝지근한 빵들이 베이커리의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 도넛의 뒤를 이어 스위트 베이커리를 이끌고 있는 번은 겉은 바삭하고 안은 부드러운 게 특징.
개당 2,000원 안팎으로 비싼 편이지만, 간식이나 가벼운 식사 대용으로 20~40대 여성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 신세계 강남점의 달로와요에선 하루 2,500~3,000개씩 팔려나가며, 단일 품목 최대의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번의 인기는 수도권과 영남권에서 두드러지는데, 특히 영남권은 전국 번 전문점의 60%가 몰려있을 정도로 번의 인기가 엄청나다. 이유는 버터의 짠맛이 이 지역의 입맛에 잘 맞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동남아 여행이 보편화하면서 '그때 먹어본 바로 그 빵'이라는 친숙한 인상도 인기 비결로 작용하고 있다. 향과 맛이 자극적이지만 외국에서 먹었던 특별한 기억으로 인해 거부감이 사라지는 것이다.
■ 납작하게 눌러 먹어야 제맛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부풀어오른 번을 먹을 때 빵이 눌릴까봐 전전긍긍하지만, '공갈빵' 같은 번은 도리어 납작하게 눌러먹어야 제맛이다. 그냥 먹으면 테두리쪽은 심심하고, 속은 느끼하기 때문이다.
달로와요 본점의 김창국(39) 점장은 "번은 납작하게 눌러 먹어야 빵 속의 버터가 골고루 퍼지면서 버터의 짠맛과 고소한 맛이 외피의 단맛과 한데 어울린다"며 "깊은 풍미를 즐기려면 반드시 눌러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달달한 번을 먹을 때는 아메리카노 커피 같은 담백한 음료를 곁들이는 게 좋다. 우유나, 밀크티, 허브차 등도 잘 어울린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