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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3> 세상을 바꾸려고 대학에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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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3> 세상을 바꾸려고 대학에 들어가다

입력
2009.07.12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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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교를 여러 곳 다녔다. 한 학년이 13명밖에 안 되고 책걸상도 없는 교실에서 2개 학년을 한 선생님이 가르치는 '남산분교장'에 입학한 후 초등학교 3곳, 중학교 1곳, 고등학교 2곳, 대학 2곳을 다녔으니 우여곡절이 많았다. 내가 '세상을 바꾸었으면' 싶었던 데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경남 밀양 산골 동네에 살던 우리집은 삼촌들과 형님 누님들 결혼시키고 살림 내주느라 가산이 탕진 되어 김해 장방에 있는 작은 방앗간을 사서 이사했다. 내가 거들지 않으면 방앗간을 돌릴 수 없어 방앗간 일을 도우며 다닐 수 있는 진영중학교에 다녔고, 고등학교도 진영 한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거기 계속 다녀서는 대학 문 앞에도 못 갈 것 같아 안간힘을 써서 마산공업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입주 가정교사를 했으나 공부방도 있고 책상도 있어 공부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관존민비 사상 때문에 발전하지 못한다'는 말이 많아 내가 그런 잘못된 사상에 사로잡혀 판검사가 되려는 것 아닌가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던 차에 담임선생님이 나더러 수학을 잘 한다고 당시 인기가 있던 서울공대 화공과에 진학하라고 권유해 그렇게 하려 했다.

그런데 입학시험 두어달 전 강직하기로 소문난 생물 선생님이 대학진학과 관련하여 따끔한 훈시를 했는데, 대학은 평생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 적합한 학과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를 두고 질책하는 것만 같아 세상을 바꾸려는 나에게는 서울법대가 적합할 것으로 보아 서울법대에 진학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려면 독일어를 선택해야 하는데 마산공고에서는 독일어를 배우지 않아 남은 기간 독일어 공부에 전념할 작정이었다. 독일어 공부하느라 두어달 왔다 갔다 하다 서울법대에 낙방하고는 동국대 법대에 진학했다.

가정교사에는 '도를 통했다' 할 정도여서 시간제 가정교사를 하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러 이화동에 있던 '박문법률연구원'이란 독서실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재수하는 학생들을 보고는 서울법대에 다시 시험을 쳐 입학했다.

서울법대에 입학한 나는 사법시험을 쳐 판사나 검사가 되어 사회 각 부문에서 30여명의 유력인사를 규합해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고자 했다. 대학생으로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나 4ㆍ19혁명과 5ㆍ16쿠데타 직후라 이런 생각을 해본 것 같다.

그래서 토론회에 참석하거나 동기생들과 세미나를 하면서 세상을 바꿀 동지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찾기 어려워 적이 실망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대전 '복지농도원' 한인수 원장의 강연을 듣고 농민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고, 특히 막사이사이상 수상으로 유명했던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자 대학을 중퇴하고 농군학교에 입교할 생각으로 경기도 광주에 있는 농군학교에 가보기도 했다. 그러고서 김용기 선생의 강연을 들었는데, 근검, 절약 등 도덕적인 것만 강조하는 것을 보고는 상당히 실망해 농군학교 입교를 단념했다.

이 무렵 나는 전주고를 나와 같은 독서실에 있던 소진방과 많이 어울렸는데, 그는 마르크스와 레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사회주의를 아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가난과 갈등이 없이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바라던 나로서는 당연히 사회주의 사회를 동경하게 되면서 사회주의에 대해 무척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 때는 마르크스나 레닌의 저서를 직접 접하기는 어려웠고, 기껏해야 김상협의 '모택동 사상'이나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같은 책에 인용된 마르크스나 레닌 또는 마오쩌둥의 말을 보면서 사회주의가 어떤 이념인지를 아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사회주의의 중요 내용은 알았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이 무렵에도 나는 사회주의의 모든 내용을 다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며, 특히 사회주의를 한다는 북한이 일인독재와 장기집권을 하는 것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도 그런 것 같아 사회주의의 비민주성이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과 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기는 했다.

그런 가운데 서울법대에서 대표적 이념 단체였던 사회법학회에 가입해 조영래를 만났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세상을 바꾸는 일에 의기투합해, 내가 묵고 있던 독서실이나 갈현동 그의 집에서 함께 자기도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대에 수석으로 입학해 민주화운동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인권변호사로도 유명했던 조영래와의 만남은 내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그와 함께 한 일도 많아 그의 인품과 역할에 대해서는 별도로 말할 기회를 갖고자 한다.

1966년 9월 '삼성재벌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졌는데, 김두한 의원이 국회에 똥물을 끼얹은 것이 이 때였다. 조영래와 나는 이 밀수사건을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준비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동지들을 만났다.

당시 제적상태에 있으면서 후배들을 지도했던 이영희, 장명봉, 박종익 선배를 비롯해서 김재천, 이석희, 박세일, 권병태, 양건 등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세상을 바꿀 동지를 만난 기분이어서 대단히 기뻤다.

그래서 판검사가 되려고 법과대학에 들어온 것이 부끄러웠고, 법과대학이 아니라 경제학과에 진학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혁명을 위해서는 경제학을 알아야 하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학 공부에 열중했고, 일본어로 된 경제학 책 읽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러니 사법시험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렸는데, 이것은 곧 오직 사회변혁에 매진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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