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엷은 돌빛의 옷을 입고 왔다
기다란 치마 흐르며 왔다
멀리 고향의 산간 지방에서 왔다
산나리처럼 고개 꺾으며 오래 걸어서 왔다
제비똥 떨어진 그루터기에서 신발을 고쳐 신으며 왔다
일요일, 점심 때도 훨씬 지나 도착한 그녀는
내 집 마당 대추나무 아래 조그맣게 서 있었다
눈 밑 그늘진 곳이 더 파랬다
오는 대로 나를 불러 깨우지 않고 참!
언제까지 서 있으려고 바로 깨우지 않고 참!
● 시인이 비를 '그녀'라고 부르는 것이 참 재미있다. 시인이 '그녀'라고 부르는 이 비는 장대비나 폭풍 속에 휩쓸려 내려오는 머리칼이 치렁치렁한 사나운 비는 아닐 것이다. 가만가만 속닥속닥 오는 비.
쉬엄쉬엄 먼 길을 걸으면서 옷매무새를 고치면서 신발을 가지런히 다시 신으면서 아무도 모르게 오는 비. 마치 조신한 여인이 오는 기척조차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대추나무 아래에 조그맣게 흔적만 남은 비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시인이다.
시인은 일요일에 점심을 먹고 잠시 잠이 든 듯. 그리고 흔적만 남은 비를 보면서 미안해한다. 왔으면 '깨우지 않고, 참!' 자근자근 내리는 비를 '그녀'라고 부르기까지 삶에는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 그 많은 일을 겪어내고도 자연의 일을 친구 맞아들이듯 하는 시인의 나직한 목소리가 참 좋다.
허수경ㆍ시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