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철 지음/후마니타스 발행ㆍ368쪽ㆍ1만5,000원
"확성기 방송은 심리전의 일종으로, 방송 진행 역시 훈련을 받은 군 요원이 담당했다. '우리 오늘 점심에 갈비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다.' 그런 유치한 대꾸들이 반복됐다… 2002년 한ㆍ일 월드컵 때에는 확성기를 통해 한국 경기를 생중계했는데, 한국 팀이 골을 넣으면 북한 군인들 쪽에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39쪽)
한반도는 55년 11개월째 정전협정이 발효 중인 공간이다. 냉전은 이제 세계사 교과서의 한 챕터가 됐지만 한반도의 분단은 여전히 삼엄하다. 그러나 55년이란 시간은 냉전의 색채마저 바꿔놓았다.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분단이라는 현실은 더 이상 증오나 그리움의 모티프가 되지 못한다. 10~20대의 절반 이상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연도조차 모른다. 책 제목처럼, 분단과 냉전은 이제 '추억'의 대상인지 모른다.
북한 정치를 전공한 저자는 다양한 각도에서 군사분계선 이북을 들여다봤다. 재계(삼성경제연구소 북한연구팀)에서 대북사업 현장을 겪었고, 학계(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제정책을 비교 연구했다. 참여정부 시절 통일부장관 정책보좌관으로 남북회담의 실무를 다룬 경험도 있다. 가까이서 바라본 분단에서 저자가 접한 것은 낯섦, 그리고 그 낯섦이 빚어내는 생경한 웃음이다. 저자는 그것을 "우습지만 슬픈 냉전의 풍경"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책을 쓴 이유를, 냉전의 풍경을 그저 유치한 코미디로 받아들이는 젊은 세대와의 공감을 위해서라고 밝힌다. 그는 훈계하려 들지 않는다. "냉전의 세월이 흐를수록 문화의 차이도 커진다. 차이가 코미디의 소재로 사용되기도 한다. 웃긴다. 하지만 그 웃음은 블랙이다… 오해에서 이해로 가는 길은 평탄하지 않다. 공존의 시각이 필요하다. 특히 젊은 세대와의 공감은, 남북 관계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반드시 해야 할 숙제라고 생각했다."
책 속에는 눈물의 기억, 증오의 말, 실소의 순간이 교차한다. "분단이 인생을 앗아간 조작 간첩 사건, 무능이 빚어낸 대북 정책의 좌충우돌 풍경, 문화 현장에서 부딪치는 낯선 신랄함, 그리고 주는 사람의 생색과 받는 사람의 불쾌가 어우러진 웃음의 장면들, 어색하고 유치한 경쟁"들이다. 저자는 그것을 통해 젊은 세대가 냉전을 기억하고 성찰하는 길을 튼다.
본론은 1971년 8월 20일 남과 북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북측 대표가 소개에 이어 본론을 말하기 시작하자, 남측 김연주 대표는 큰일났다고 생각했다. 역사적인 첫 회담의 첫번째 발언은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한다는 방침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1분 이상 두 대표가 동시에 발언하게 되자 북측 대표가 '김 선생!' 하며 큰 소리로 불렀다."
블랙코미디는 하나같이 첨예한 대결의 순간에서 빚어진다. 분단 현대사의 기묘한 아이러니다. "남과 북이 서로를 방문하기로 결정하자, 길부터 닦아야 했다. 통일로에는 급한 나머지 뿌리도 없는 나무를 심기도 했다… 봉산, 사리원을 지나 황주로 가는 동안 비가 억수로 왔으나 채소밭의 스프링클러는 계속 물을 뿌리고 있었다."
남한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자신의 집을 철거하는 철거반원을 향해 '김일성보다 더한 놈들'이라고 항의했다가 보안법으로 잡혀간 사람이 있었다… 검사는 '북괴가 대한민국보다 나은 행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에 해당된다'며 상고했다."
코미디의 속도감이 붙어가던 이야기는, 페이지가 절반쯤 넘어가면서 묵직해진다. 우선 이산가족 상봉의 풍경. 1980년대 눈물로 범벅이 되던 만남은 2000년대에 이르자 '멈칫거림'으로 변해간다. "다만 야속한 것은 세월이었다. 이름은 뭐고, 집은 어디였고… 그렇게 세월을 거슬러 기억을 더듬거리며 확인을 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야 울었다. 눈물의 의미는 복잡했다."
이른바 1994년 위기의 진실, 북핵을 둘러싼 남북 협상 과정에서의 뒷얘기 등도 새로운 시각으로 서술된다.
저자는 되풀이되는 갈등과 위기를 통해 "1950년대의 시간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사람들"의 실체를 바로 볼 것을 주문한다. "한국에서 색깔은 실력을 감추는 옷이다… 오늘도 무능한 정부는 공포를 뿌린다. 망각의 안개처럼. 그러나 역사는 기억할 것이다. 무능과 오기가 얼마나 국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지."(152쪽)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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