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자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고 한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짓말의 합창은 그러니까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어서 맑은 하늘에 천둥과 번개를 부를 정도의 힘을 충분히 가진 것이었다".(246쪽)
공지영(46)씨의 새 장편소설 <도가니> (창비 발행)는 실제로 지방의 한 청각장애인 학교에서 벌어졌던 집단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했다. 거대한 흰 짐승 같은 해무가 밀려오는, 지방의 작은 도시 무진에 위치한 한 청각장애인 학교가 소설의 무대. 기간제 교사로 이 학교에 임시발령받은 강인호와 이 도시의 인권운동센터에서 활동가로 일하는 그의 대학 선배 서유진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도가니>
출근 첫날 대면 자리에서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악수도 않고 사라져 버리는 교장, 인사를 하자마자 '학교발전기금'이라는 명목으로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행정실장 등 학교에 부임하자마자 강인호는 그들에게서 웬지모를 '야만의 냄새'를 맡는다.
현실은 예감보다 훨씬 더 잔혹했고, 강인호가 거대한 폭력의 실체를 알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교장과 행정실장, 기숙사 생활지도교사는 듣지 못하는 장애아들과 중복장애아를 상습적으로 성폭행, 구타해왔고 강인호는 서유진에 도움을 청해 이 사건의 실체를 폭로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러나 그들이 법의 심판을 받게 하려는 강인호의 시도는 진실을 은폐하려는 지역사회의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 앞에서 수포로 돌아간다.
수사 의지가 없는 경찰, 피해 아동의 상처가 성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산부인과 의사, 선배를 도와주기 위해 젊은 시절 무심코 전교조에 가입했던 일을 빌미삼아 강인호를 공격하는 가해자측 변호사 등. 결국 교장은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어처구니없는 결과 앞에서 강인호는 깊은 절망감에 빠진다.
이 소설은 2008년 12월부터 지난달까지 인터넷 포털 다음에 연재됐던 작가의 첫 인터넷 연재소설이다. 30일 기자간담회에서 공씨는 "처음에는 낙후된 한 지역사회의 야만적 폭력을 다루려고 했는데, 연재하다보니 불행히도 나라 전체가 무진으로 바뀌어가는 듯한 분위기를 느꼈다"고 소감을 밝혔다.
공씨가 썼던 1980년대의 '저항소설'(작가의 표현이다)과 달리 주인공 강인호가 싸움을 포기하고 서울로 상경하며 서유진이 그를 이해해준다는 이번 소설의 결말도 주목할 만하다.
작가는 "젊은 시절에 썼다면 회색분자이자 배신자로 그렸을 강인호를 마지막에 감싸안아준 것은 내 시선이 성숙해진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며 "젊어서 하도 많이 내쳐서 그런지 지금은 그런 소시민적인 인물들도 다함께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10차례 이상 실제 사건이 발생했던 지방의 장애인학교를 방문해 소설을 완성했다는 공씨는 "견제하는 시스템이 없는 권력은 필히 폭력적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며 "그 침묵의 카르텔을 주시하는 것, 그것이 우리 시대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을 맺었다.
소설 제목은 작가가 대학시절 감명깊게 봤던 아서 밀러의 연극 '크루서블'(The Crucible)에서 착상한 것이라고 한다. 공씨는 또 한국문학사에 있어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상징하는 작품인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에서 작품의 구조를 차용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김승옥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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