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평창군 대관령면에 한국자생식물원(원장 김창열)이 있다. 우리나라의 야생화를 중심으로 2.200여종이나 되는 많은 꽃을 가꾸는 곳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점점 없어져가는 희귀식물을 보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 26일, 이 식물원이 개원 10주년을 맞아서 기념행사를 했다.
이 자리에는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 정광수 산림청장, 최열 환경연합 대표, 권혁승 평창군수, 최양부 전 농업통상대사, 이숭겸 신구대학 총장 등 많은 축하객들이 참석을 했다. 행사가 끝나고 오후에 잔디밭에서 축하공연을 열었는데 가수 최백호와 장사익의 노래를 들으며 참석자들 모두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 자리에서 최백호는 이런 말을 했다. "제가 20대에 가수로 데뷔를 했습니다. 그때 큰 산을 하나 만났는데 송창식입니다. 그 산을 넘어가기가 힘들 것 같아 옆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더 큰 산을 또 만났습니다. 바로 장사익 이라는 산입니다. 이제 저도 나이가 들고 해서 산을 돌아가는 것도 힘들 것 같아 그냥 옆에서 빌붙어 살기로 했습니다."
같은 가수로서 하기 힘든 말 일 텐데 최백호는 주저 없이 했다. 사실 장사익은 큰 산임에 틀림없다. 그는 스스로를 가수라고 하지 않고 소리꾼이라고 칭한다. 그 말이 맞다. 그는 소리꾼이다. 그것도 타고난 소리꾼이다.
장사익이 음악하고 인연을 맺은 것은 1980년, 그의 나이 31살 때라고 한다. 국악인으로 출발을 했다. 태평소 연주를 하고, 대금을 불었다. 그러나 생활이 힘들어 여러 가지 직업을 갖게 된다. 보험회사 직원도 하고, 자동차 배터리를 갈아 주는 카센터를 경영하는 등 10여가지 직업을 가졌다고 한다.
장사익은 1949년 충남 홍성군 광천읍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올해에 회갑을 맞았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러서 가수가 될 소질을 보였던 모양이지만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결국 노래의 길로 들어선 것을 보면 그의 운명이 아닌가 싶다. 46살에 데뷔를 한다.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데뷔를 한 다른 가수들은 이미 활발한 활동을 접을 나이에 그는 도대체 '무얼 믿고' 이 험한 가수의 길로 들어선 것일까?
"다른 사람들은 가수생활을 하면서 인생 공부를 하지만 저는 인생 공부를 먼저 했으니까 남들보다 더 편하게 노래 부를 수 있어서 더 좋아유. 늦지 않았슈. 이제부터 노래 부르기 좋은 나이라고 생각해유."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아주 잘 어울리는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참 편하다.
그리고 그는 잘 웃는다. 항상 웃는다. "열심히 노래 부르면 저를 좋아해 주는 분들이 있겠쥬. 제 노래를 듣고 딱 한 사람이 좋아해도 저는 기분이 좋아유." 달변이 아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은 항상 순수하다.
소리꾼 장사익의 노래는 삶과 꿈을 말하고 있다. 삶에서 그는 처절할 만큼 슬픈 소리를 낸다. 목소리가 아닌, 몸 전체에서 피를 토해 내듯이 슬프게 노래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슬픔을 들으면서 꿈이 솟아난다는 것이다.
공식 홈페이지를 보면 "장사익의 노래에서 위안과 희망을 담아 가세요"라고 쓰여 있다. '위안과 희망'이 장사익의 브랜드 인 것이다. 그가 발표한 노래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찔레꽃, 희망한단, 시골장, 민들레, 황혼길, 자동차, 등등 노래 속에 사람 사는 모습을 그림 그리듯 담고 있다.
"하얀꽃 찔레꽃 순박한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그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인 '찔레꽃'의 가사다.
이 노래를 미국 공연 때 불렀고 남아프리카 공연 때 불렀다. 우리 말 가사를 알아듣지 못하는 현지인들이 장사익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감동 받았다고 최열 환경운동연합 대표가 나한테 귀띔해 주었다.
내가 장사익을 만난 것은 그가 데뷔할 무렵이다. 나는 SBS 라디오에서 프로그램을 맡아 진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게스트로 출연을 했다.
국악인으로 활동을 하다가 가수로 데뷔하는 특이한 경력 때문이 아니라 높은 음에서 나오는 독특한 매력과 청중을 압도하는 목소리, 그리고 한 곡 한 곡 부를 때마다 마치 마지막 노래인 듯이 절규하는 가창력이 그를 잊지 못하게 하는 듯 했다. 그 후로도 우연히 만나면 그는 무척 정겹게 다가와 인사를 한다.
그와 나의 인연은 또 다른 곳에서 생긴다. 그의 부인인 고완선과의 인연이다. 그녀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예술경영학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 내 강의를 두 학기 수강을 했다.
고완선은 장사익을 큰 소리꾼으로 만드는 기획회사인 '행복을 뿌리는 판'의 대표를 맡고 있다. 모든 공연기획 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미지 관리까지 고완선의 손을 거쳐야 한다. 지금까지 해온 장사익의 공연과 디스크 앨범들, 꿈꾸는 세상, 하늘가는 길, 사람이 그리워서, 꽃구경 등등이 모두 고완선의 기획이다.
나는 5월 1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그의 콘서트 '꽃구경'을 구경 갔다.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은 마치 혼을 부르는 거 같았다. 종을 치며 노래를 할 때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울면서 노래하는 그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그리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장사익, 그는 분명히 이미 '큰 소리꾼'이 되었고, 모두가 사랑하는 '작은 거인'이다.
그 동안 연재해온 '지금은 말 할 수 있다'를 오늘로서 막을 내리고자 한다. 연재를 마칠 때 장사익에 대한 글을 쓰는 이유는 그의 브랜드인 '위안과 희망'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65회가 되도록 격려해주신 여러분들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졸고를 실어준 한국일보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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