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한국말이 서툰 몽골계 러시아인인 부인 옥사나 알페로바(39)는 계속 영어로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남편 한대수(62)씨는 "(인터뷰 중이니) 조용히 하라"고 벼락처럼 소리 질렀다. 딸 양호(2)가 놀이방에서 돌아오자 집은 시장바닥이다.
한씨의 말로는 "제2의 이다 도시가 되고 싶어하는" 옥사나가 딸에게 먹인다고 호박전을 부치기 시작한 것이다. 한씨는 강한 경남 사투리 억양으로 더 크게 말을 이어갔다.
완벽한 소란의 풍경 속에서, 그는 몇가지 금쪽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나는 음유시인의 전통을 그대로 잇는다"며 자신의 예술을 선명히 정의할 때, 그는 여전히 자존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의 '세계성'은 미국에서 30년을 살았고, 한국과 미국을 50여 번은 왕래했다는 이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그는 1년에 한 번 꼴로 한국어로 또 영어로 신보를 내는 부지런한 가수이다. 영어를 통해 세계화에 빨리 적응해야 한다고 다그치는 이 시대, 영어로 지은 그의 노래들은 어디 한 번 해보자는 듯 삐딱하다. 자칭 '싱어_송 라이터_기타리스트'는 여전히 꿈꾸고 있었다.
- 한국 활동을 본격 시작한 것인가.
"1997년 후쿠오카 공연 이후 매년 1회꼴로 음반 제작, 공연 활동을 하고 있다. 2007년 '베스트 오브 한대수'(서울음반 발행)를 포함, 거의 매년 앨범을 냈다. 올해 9월쯤 나올 신보까지 합치면 음반은 모두 15장이 된다.
EBS의 '공감' 방송 실황은 DVD로 나와 있다. 지금 '한대수 밴드'는 김도균(기타), 이우창(피아노), 박동식(드럼), 서울시스터스(4인조 보컬)로 이뤄져 있다.(그는 '소울ㆍsoul'이라고 한다) 웹사이트(www.hahndaesoo.co.kr)를 참고하시라."
- 스스로 걸작을 꼽는다면.
"(발표한 곡들은) 모두 다 좋지. 그런데 왜 몇 개만 알아주느냐?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지.(무슨 뜻인지 묻자 '살아있기 때문에 이해를 못 받는다'고 했다) 진짜 음악은 작곡가가 죽어야 알아주는 법이다. 즉 내 음악은 대중음악이 아니라는 거다.
안 듣기 때문에도, 못 듣기 때문에도. 그러나 죽고 나면 그리움, 안타까움이 있으니 비로소 찾게 될 것이다. 즉 보물이 보이게 된다. 존 레논의 '이매진' 들으면 왜 안타깝고 눈물이 나는가. 그래도 몇 곡 뽑으라면 '옥사나에게 바치는 노래' '그대(Eternal Sorrow)' '상처' 'As Forever' '아무리 봐도 안 보여'(양희은과 듀엣으로 불렀다) 등이다. 개인적으로는 'One Day'를 꼽겠다."
- 음악적으로,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자신에 대한 무수한 평가를 어떻게 평하고 싶나.
"나는 평론가들의 말을 중시하지 않는다. 혹평도 상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작곡한다. 내 노래는 내 인생, 내 고통이다. 나는 즐거울 때는 작곡하지 않는다. 인생이 즐거우면 작곡이 안 된다. 대중들이 내 음악 좋아하길 바라지만, 당장 이해 못 한다 해도 상관 않는다. 대학가에서 많이 부른 '바람과 나' '물 좀 주소' 역시 기본적으로는 내 개인의 노래다. 나는 내 노래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안 썼다."
- 이제 당신은 로커라 불러도 무색할 정도인데, 록에서 가능성을 보았나.
"지금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록은 죽었다. 음반회사에서 제작비도 안 댄다. 멀티미디어에 질식된 엔터테인먼트의 시대에서 음악은 액세서리일 뿐이다. '듣는 음악'은 프레슬리, 비틀스, CCR, 레드 제플린으로 끝났다. 비, 효리, 저스틴 팀버레이크는 아름다운 몸매, 희한한 패션, 노래 대신 연기로 대중을 만족시키고 있다.
방송 작업은 내 나름의 대응이다. 세계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 아리랑 국제방송에서 2년째 'Golden Goodies'(매일 오후 4시~5시30분 방송)를 하고 있다. 또 CBS 라디오에서는 매일 오전 9~11시 '손숙ㆍ한대수, 행복의 나라로'를 방송한다.
아리랑에서는 'message board'라는 온라인 통신을 통해 젊은 세대의 반응이 금방 들어온다. 미국서도 이렇게 다양한 음악을 틀어주는 프로는 없다며 교포 여학생이 편지를 보내오는데, '대수 오빠'로 시작한다."
- 가장 최근에 만든 노래는.
"'양호야'다. 두 살 된 우리 딸에게 주는 노래다. 뭐, 특별한 뜻이 담긴 이름은 아니고 흔히 '양호(良好)하다'고 말할 때의 그 양호다. 인생을 양호하게 살아라라는 정도의 소박한 뜻이다. 5회 결혼기념일에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난 아이다. 아주 활동적인 아이인데 집에 혼자 두니 너무 심심해 해서 500미터 떨어진 어린이집에 맡겼다가 데려온다. 거기서 말도, 예의도 배운다."
- 포크에서 록, 재즈까지 서양의 대중음악은 거의 거쳤는데, 국악은 안 거쳤다.
"뉴욕 살다 보니 재즈를 알게 되고, 국악이 그리워졌지만 현실적으로 연결고리가 없었다. 1995년 일본 공연 전,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을 배우기도 했다."
- 누구보다도 별난 삶을 살았다. 삶의 계기가 몇 가지 있었을 텐데.
"(한참 생각한 뒤) 첫째, 내가 태어난 지 100일쯤 지난 뒤 벌어진 아버지의 실종이다.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던 내게 아버지는 없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아버지의 존재, 중요성을 알게 됐다. 17년 만에 만난 아버지와는 늙을수록 잘 통하게 됐다.
멋도 모르고 기타 치다 1969년 드라마센터에서 솔로로 데뷔한 일이 두번째다. 내 팬들이 모금해 1, 2집이 만들어졌고, 세상은 충격을 받았다. 국내 최초의 싱어-송 라이터였다.'얼굴 없는 가수'로 통하다 곧 미국 갔다. 3년 해군 끝나고 앨범 2개 내니 20대 중반을 넘어섰는데, 내 작품은 모두 판금됐다. 강제 징집돼 3년 있었던 군대에서는 정말이지 틈만 나면 구타 당했다.
당시를 '암병동' 같은 솔제니친의 책 보며 버텼다. 영어로 된 책이어서 검열을 피할 수 있었다. 주인공이 겪는 고통이 나보다 더 크다는 생각으로. 그 시절이 세번째일 거다.
다음은 이혼과 결혼이다. 고독하던 청년 시절, 스무 살 때 만나 사랑했던 여자와는 왜 이혼했는지 딱 꼬집어서 말하기 힘들다. 뉴욕이란 데가 40대 이후 이혼률이 높기도 하지만… 권태기였고 아기도 없었다. 아기를 갖지 않겠다고 한 게 큰 이유다.
(1974~89년지 부부로 살았던 첫 아내와 헤어지고 난 뒤 그의 생활의 풍경은 '하루 아침'에 이렇게 그려져 있다. '소주나 한 잔 마시고/ 소주나 두 잔 마시고/ 소주나 석 잔 마시고 일어났다') 그러나 옥사나를 만났지 않은가. 내 음악을 이해해 주고, 나를 사랑하는데다, 또 미인이고…"
- 여복이 많은 것인가.
"에이, 나는 모르겠어."
- 요즘 작곡은.
"작곡과 섹스는 똑같다. 나이 들수록 횟수가 줄어든다는 점에서. 50 넘으면 뇌세포가 줄어들고, 60 되면 키가 줄어든다. 10년 전 입던 옷이 이제는 크다.
- 한류를 어떻게 보나.
"(대중음악 쪽에서위) 한류란 없거나, 살짝 사기다. 세계적 히트곡도 없는데 무슨 한류냐. 진짜 한류 스타 만들려면 뭣보다 영어로 작곡해야 한다. 비에게 아쉬운 점이 이거다. 스웨덴의 아바, 자메이카의 밥 말리, 아이슬란드의 *** 뵤크 등 모두 영어로 한다. 시급한 과제다. 또 세계 각국의 문화를 연구, 먹혀들어갈 것을 연구해야 한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영어로 작사ㆍ작곡한 자로서 하는 말이다.
국내 시장은 병아리 눈물이다. 작곡ㆍ작사는 물론 미국 문화의 콘텍스트 같은 문제들에 대해 나는 언제든 최대한 돕고 싶다. 아직 의뢰는 없지만.(웃음) 나는 뉴요커 35년이다. 어느덧 60 넘은 게 슬프지만, 고문 역은 충분히 할 수 있다. 내 감각은 살아있다. 아바에서 브리트니 스피어스까지, 댄스 음악을 즐겨 듣는다."
- 도저히 연관이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이 말에 그는 숨이 넘어갈 듯 한참을 웃었다) "음악의 목적이 뭐냐. 고독과 슬픔을 해소하는 인생 치료제다. 바흐, 모차르트가 아직 대가로 대우받는 게 그래서다."
- 한국의 대중음악계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TV PD들이 반주 녹음, 립싱크를 절대 허용하지 말 것. 그래야 연주자가 큰다. 라이브하면 엔지니어도 큰다. 빌리 조엘 왔을 때 테크니션 50명도 함께 왔던 건 한국에 인력이 없기 때문 아닌가.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가장 즐거운 건 보는 사람들이다. PD들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제작비 핑계만 대지 않나. 결국 사장님의 문제란 말이다. (거기 대해) 나 자신으로서는 방법 없다. 방송하는 것이 그래서다. 후배들에게는 '돈과 명예 때문에 (예술을) 하면 실패뿐'이라는 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
- '양호'라는 이름은 딸 이름치고는 매우 독특한데.
"밴드 멤버들과 함께 들렀던 캐나다의 토플리스 바에서 퍼뜩 떠오른 이름이다. 거기는 토플리스 바가 널려 있는데, 구경 온 사람들은 돈을 내면 아가씨(댄서)들을 만질 수 있게 돼 있었다. 키스나 섹스는 절대 금물이다. 가짜 금발 천지인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그녀들한테 홀딱 반했다. 나는 거기를 '양호'한 곳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아이 이름으로 된 것이다."
● '팔방미인' 아내 옥사나
5년 전 입국, 한대수의 '독거 생활'을 끝낸 옥사나는 러시아에서는 패션 모델로, 뉴욕에서는 국제증권회사의 중간 간부로 일했다. "내가 바람날까봐 온 것도 있겠지만, 하여튼 부부는 헤어지면 영원히 헤어지는 법이죠. 여기 와서도 금융 쪽으로 일을 했으면 하는데, 지금 아이가 겨우 두 살이라…." 한씨의 말이다.
그녀는 원래 간호사로 있다가, 페레스트로이카 때 미국 대사관으로 정치적 망명을 신청해 새 삶을 개척했다. 1991년 뉴욕에 가서는 대학에서 증권 공부를 했다. 날씬한데다 이국적 풍모를 지닌 덕에 20살 때부터 2년 동안 패션 모델 활동도 했다.
브루클린에서 아파트를 구하다 알게 된 이들은 1991년 뉴욕에서 결혼했다. "뉴욕에서는 바쁘게만 살다 아이 가질 엄두를 못 냈는데, 한국에서 양호가 태어나니 기적이에요." 그녀는 남편을 "진짜 시인"이라 했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