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빠르다. 온 국민을 놀라게 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의 기억이 어느덧 아스라하다. 부정선거 시비로 유혈사태를 빚은 이란 소식도 빛이 바래간다. 우리나라에서 부정선거 시비가 사라진 때가 언제였던가. 우리는 부정선거 수준은 졸업한지 오래라며 안도해야 하나.
감흥없는'떡볶이 집'다툼
여야가 미디어법등 쟁점법안을 둘러싸고 극한 대치하는 가운데 나온 '떡복이 집'말싸움은 여전히 강퍅한 우리 정치문화를 그대로 드러낸다. 한나당은 민주당 이석현 의원이'대통령이 간 그 떡볶이 집은 망할 것'이라고 말했다며, 민주당을 '반 서민정당'으로 규정하고 사죄를 요구했다. 장본인인 이 의원은 '떡볶이 집 가지 마십시오. 손님 떨어집니다'고 말한 것을 왜곡했다며, 말을 지어내 민주당과 서민을 이간질하지 말고 부자 위주의 반 서민 정책을 수정하라고 반박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서민정치 행보'를 둘러싼 악 받친 말싸움이 오가지만, 정작 구슬땀을 흘리며 생업에 바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 정치를 모른다, 꺼린다는 말을 듣던 대통령이 떡복이 집에 들르고 아이를 들어 올렸다고 해서 뭐 그리 욕을 해대느냐며 어이없어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대통령의 서민 행보와 중도강화론으로 등원거부 명분이 약화될까 우려하는 민주당의 속내나, 이 의원의 발언을 교묘하게 틀어 저주처럼 들리게 만들고 가게 주인 아들의 이메일까지 이용해 민주당을 반 서민정당으로 매도한 한나라당의 속셈을 누가 모르랴. 결사 반대와 단독 강행의 논리로 의회 정치를 실종시킨 채 그저 국민을 앞에 두고 상대방을 헐뜯고 국민에게 교언영색으로 아첨을 떠는 게 부정선거를 졸업했다는 한국정치의 수준이다.
한국의 대통령은 불행하다. 취임하자마자 촛불시위 등 계속 고초를 겪다 급기야 하야 요구가 나오고 막말까지 듣는 상황이 됐으니 대통령 노릇 하기
참 힘들겠다. 그러나 대통령 정치는 바로 그 곳, 국론이 갈리고 파당과 계층과 지역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부글부글 끓는 그 난리 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나라는 CEO를 바라보며 능력을 발휘하여 실적을 내기위해 안달하는 직원들의 회사가 아니다. 취임선서에는 없지만 국민과 사회, 공동체의 화합을 이끌어 내는 것이야말로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책무이다.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일 못지않게 평안하게 이끄는 것도 국민이 기대하는 대통령의 막중한 소임이다.
살벌한 여야 대치가 파국으로 치달아 나라 전체를 갈등과 혼란에 빠뜨리지 않도록 대통령이 담대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는 없을까. 대통령이 나서서 여야 대표들과 협의하여 미디어법중 신문방송 겸영이나 대기업의 방송사 지분 소유 허용 부분을 큰 폭으로 양보하든지 하여 대승적 합의를 도출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정책이 좌절된 것으로 생각하거나 향후 선례가 될까 우려할 일은 아닐 것이다. 집권 여당이 능히 다수의석으로 관철시킬 수도 있었지만 국태민안을 위해 대승적 양보를 했다는 사실은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담대한 선택으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의회 정치의 파국을 걱정하는 국민은 대통령의 리더십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평안한 나라 이끄는 리더십
대다수 국민은 나라가 평안해지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도록 정치가 감당해야 할 몫이 크다. 국민에게 방송 선택권을 돌려준다고 하지만 정작 국민이 바라는 것은 나라가 좀 평안해지는 것이다.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 주는 것만이 소통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국민은 우리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인지, 올바른 민주주의의 길을 가고 있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당면한 정치적 파국을 피하는 차원을 넘어 제대로 된 통 큰 대통령 정치의 진면목을 보고 싶은 것이 우리 국민 모두의 바람이다.
홍준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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