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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선덕여왕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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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선덕여왕을 다시 본다

입력
2009.06.28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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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 <선덕여왕> 이 인기다. 이름만 전해오던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 를 바탕으로 삼았다는데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언니 천명공주(天明公主)와 쌍둥이였고, 태어나자마자 궁녀가 데리고 도망쳐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기록에 없다.

우리 역사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신라 27대 임금으로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둘째 딸로 태어나 632년에 즉위해 16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삼국사기> 는 덕만공주가 진평왕의 맏딸이라고 했지만, <삼국유사> 와 <화랑세기> 에는 천명공주가 맏딸로 나온다. 고루한 유학자 김부식은 <삼국사기> 에 이렇게 썼다.

'…사내는 높고 계집은 낮은 것이다. 어찌 늙어 빠진 할미가 안방에서 튀어나와 국정을 좌우함을 허용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자를 잡아 일으켜 임금 자리에 앉게 했으니 참으로 어지러운 세상에나 있을 일이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조카 김춘추(金春秋)의 출생연도 602년을 근거로 추산하면 선덕여왕은 즉위할 때 48세 정도로 보인다. 1,500년 전에 여자 나이 쉰 살이면 할머니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총명했기 때문에 숱한 왕족 진골(眞骨) 야심가를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고, 왕실에 성골(聖骨) 남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왕의 즉위를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다. 즉위 한 해 전인 631년에 칠숙(柒宿)과 석품(石品)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모두 처형됐다. 아들이 없는 진평왕의 아우 백반(伯飯)과 국반(國飯) 두 삼촌도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을지 모른다. 그런 까닭에 덕만공주는 꾸준히 지지세력을 모아야 했을 것이다.

선덕여왕은 즉위 이후에도 여왕의 한계를 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위년 1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즉위 사실을 알리고 조공했으며, 이듬해 7월에도 사신을 보내 조공한 것은 당과의 우호관계를 강화하고자 노력했다는 증거이다. 이 같은 외교활동이 고구려와 백제의 지속적인 군사적 압박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도 김부식만큼이나 여자를 우습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라에 사람이 없어서 여자를 임금으로 내세웠느냐"고 노골적으로 깔보았으며, 신라 사신이 올 때마다 모욕적인 언사로 무안을 주었다. 그래도 강적 고구려와 상대하기 위해서는 신라를 이용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마지못해 선덕여왕을 진평왕의 후계자로 인정하는 봉작을 내렸으니 선덕여왕 즉위 3년 만이었다.

선덕여왕은 이처럼 즉위 초부터 대외적으로는 당과의 외교 강화를 통해 국가안보를 기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불교의 힘으로 민심을 통합하여 안정을 이루기 위해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켰다. 또한 준군사조직 화랑도를 적극 후원하여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선덕여왕이 총명하지 못하거나 의지가 약했다면 16년간이나 오랫동안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를 보면 부국강병과 국리민복은커녕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사회의 양극화를 조장하기 일쑤인 후세의 못난 남성 지도자들은 매우 부끄러워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여자보다 못한 지도자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정치를 업으로 삼아 나라를 이끌겠다는 이들은 누구든 선덕여왕의 빼어난 수신(修身)과 치세의 리더십을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황원갑 소설가ㆍ 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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