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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급식은 밥만 주는 게 아니다

입력
2009.06.28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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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풍경.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넙적한 옥수수떡이 나왔는데, 수업이 끝날 무렵 담임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며 나눠주었다. 형제자매가 많은 집에선 그 떡을 모아 가루로 만들어 죽을 쑤었고, 학교에 안 다니는 동생들과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했다.

누구나 그렇지만 못 먹었던 건 서러운 기억이다. 하지만 그러한 배고픔은 다 잊혀졌다. 지금까지 아물지 않은 마음의 상처는 그 때 담임선생님의 '호명'이었다. 친구들이 보고 있는데 옥수수떡을 받으러 교단 앞으로 나갈 때의 심정은 요샛말로 '이름 불려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마라' 그것이었다. 먹고 싶고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일부러 못 들은 척하며 딴청을 피우다 빨리 나오지 않는다고 야단까지 맞는 날이면 정말로 학교 다니기가 싫었다.

경기도교위의 무지한 예산삭감

지혜로운 선생님들의 사려 깊은 행동도 있었다. 순번을 정해 교대로 나눠주거나 방과 후 남모르게 가방에 넣어주기도 했고, 아예 떡을 쪼개 모든 학생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기도 했다. 순번을 기다리느라 등교가 즐겁고, 순번이 아닐 때엔 나눠 먹기도 했다. '가난한 집안의 표시'가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하는 음식'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형편이 나은 아이들이 그 떡과 자신의 군것질 음식을 바꿔먹기도 했다. 누군가 자신의 순번으로 받은 떡을 남몰래 건네주었을 때의 고마움은 평생 잊을 수 없다.

학교급식은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지만, 그것으로 아이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안긴다면 그냥 굶게 내버려 두는 것이 오히려 낫다. 배고프다는 사실보다 친구들에게 내가 굶는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사실이 더 견디기 어렵다. 어린이 학교급식에서 밥의 양이나 빵의 크기보다 더욱 세심하게 배려해야 할 대목이 많은 이유다. 그 최소한의 방식은 되도록 모두에게 균등한 급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어른들이 이를 모른다면 아이들보다 못하다.

어른도 보통 어른이 아니고, 오랫동안 교육계에 몸담았다면서 개인적 입지나 정치적 속셈 때문에 스스로 '아이들보다 못한 어른'이 돼버린 경우가 있다. "도와주지 않아도 될 아이들에게 학교급식을 주는 것은 예산 낭비"라는 논리를 펴면서 '밥을 얻어먹어야 하는 아이'를 추려내고 지목하여 최소한의 시혜를 베풀면 된다는 어른들이다. 그 옛날 굳이 이름을 불러 교단까지 나오게 한 뒤 친구들 앞에서 옥수수떡을 나눠주던 어느 선생님을 연상케 하는 어른들이다.

경기도 내 농산어촌과 도시지역 영세한 초등학교의 무상급식 확대를 위해 교육감이 책정한 예산을 도교육위원회가 절반으로 삭감했다는 소식(한국일보 26일자 14면)은 참으로 황당하다. 2학기부터 400여 초등학교 15만3,000여명에게 단체급식을 해주기 위해 잉여예산 가운데 171억1,000만원을 책정했는데, 그것이 '무조건 절반'이라는 아리송한 기준으로 깎여 정확히 85억5,500만원만 승인됐다. "새로 선출된 김상곤 교육감의 선심정책을 제어한다"고 이유를 달았단다.

전체 추경예산(3,656억6,500만원) 가운데 5.6%를 삭감했는데, 혁신학교 추진과 무상급식 확대만 그렇게 됐다. 진보정책에 대한 교육위원회의 견제를 감안하여 혁신학교 문제는 그렇다 치자. 초등학생 무상급식을 확대하는 게 진보냐 아니냐의 잣대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엊그제 청와대 시ㆍ도교육감회의에서 학교급식 확대를 강조한 이명박 대통령은 갑자기 진보주의자가 됐기 때문인가.

나눠줄 때도 차별의 상처 없게

어른들의 얄팍한 정치적 계산으로 아이들에게 배고픈 설움을 주어선 안 된다. 더욱이 그들에게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면서 마음의 상처를 남겨서는 절대 안 된다. 더 늦기 전에 무상급식 확대에 필요한 예산을 재검토해야 한다. 교육위원들이 삭감하지 않고 그냥 통과시켜 버린 94.4%의 추경예산을 지켜보는 사람이 많다.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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