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초 오전 5시께 서울 창동역 근처 한 인력소개소. 구릿빛 피부의 막노동 베테랑부터 대학생,'하얀 손'의 40~50대까지 100여명이 몰려 들었다. 2007년에 제대하고 지난해부터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대학생 김승준(26)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김씨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보다 부지런을 떨었지만 이날도 일감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용직 일꾼은 대개 연차가 오래된 숙련공들부터 먼저 부름을 받긴 하지만 김씨는 미리 눈도장을 찍어둔 터라 예전에는 쉽게 일을 구하곤 했다. 하지만 요즘엔 '공 치는 날'이 많아졌다.
학비를 벌려는 대학생 뿐만 아니라 직장인들까지 용돈벌이를 하겠다며 막노동판으로 밀려들기 때문이다. 김씨는 "예전에 기피 대상이던 막노동 일도 이젠 하늘의 별따기가 됐다"고 푸념했다.
음식 배달, 술집 서빙, 짐 나르기, 수영 강사, 스키장 안전요원, 마트 물건 진열, 음료수 배달…. 김씨가 대학 1학년 때부터 학비와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뛰었던 아르바이트 목록이다.
"안 해본 알바가 없다"는 그에게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은 '알바 달인'이다. 외환위기 여파로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고 동생도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등록금과 용돈을 아르바이트로 손수 마련해왔다.
하지만 '알바 달인'조차도 최근엔 일 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아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다. 경기가 어렵다 보니 대학생 뿐만 아니라 직장인, 주부까지 알바 자리를 찾아 나서는데 일 자리는 확 줄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예전에 알바 했던 가게에 찾아가 말만 잘하면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지만 요즘은 알바 없이 주인이 직접 일하거나 폐업 직전인 경우가 많아 찾아가면 주인이 되레 '미안하다'고 한다"고 말했다.
최근 김씨가 한 일은 자신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 생동성(생물학적 동등성) 시험이다. 제약회사가 시판될 신약의 생체반응을 측정하는 것인데, 보통 30~40명의 사람들이 합숙하면서 약을 복용한 후 3일간 신체반응을 측정하고 2주 뒤에 한 번 더 변화를 체크한다.
비교적 고수익(약 40만~50만원)인데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만 시간을 내면 돼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선뜻 나서기에 꺼림칙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일마저도 경쟁이 치열해졌다. 김씨는 "처음 해본 건 2년 전인데 요즘은 그때보다 3배 정도 참가자가 늘어 30명 모집하면 120명이 지원해 대기자까지 생긴다"며 "최근에는 40~50대 직장인도 많이 봤다"고 전했다.
더구나 이 일은 신체 회복 등을 고려해 3개월에 한 번만 할 수 있어 안정적인 일자리는 아니다. 김씨는 다른 알바를 구하는 틈틈이 생동성 시험 관련 인터넷 카페 3곳에 가입해 7월에 참가할 시험을 노리고 있다.
김씨가 알바 자리를 구하는 데 애를 먹은 것은 지난해 10월께부터다. 어느 날 새벽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인터넷 알바 구직사이트에 접속했다가 '휴대폰 소형기지국 점검ㆍ관리 업무를 맡을 5명을 구합니다'는 게시물을 발견하고 재빨리 지원서를 넣었다.
게시물은 이날 오전 사라졌다. 게시물이 뜬 지 수시간 만에 지원자가 넘쳐 업체가 접수를 마감하고 공고를 내린 것이다. 김씨가 채용 현장에서 확인한 지원자는 50여명, 10대1의 경쟁률이었다. 김씨는 서류, 면접, 체력 검사까지 거쳤지만 결국 탈락했다.
김씨가 아쉬운 마음에 다음 모집 시기를 묻자, 담당 직원은 "결원이 생기면 모집하지만, 하루 5~6시간 일하고 월 100만 정도 받는 이런 알바는 인기가 높아 아마 결원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김씨는 요즘 새벽 인력시장에서 또래 대학생을 자주 만난다. "얼마 전에는 중학교 때 친구를 만난 적도 있는데, 힘든 일을 하면서 하루 동안 말 동무가 되어줄 친구가 생겨 좋기는 했지만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밀려왔어요." 친구 역시 대학 휴학 중이었는데, 일주일에 2~3일씩 막노동을 하며 6개월째 건설현장을 누비고 있었다.
김씨의 또 다른 친구는 얼마 전 "배를 타겠다"며 떠났다. 간간히 일하는 알바 자리로는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없어 몇 개월 배를 타 목돈을 번 뒤에 공부에 전념하겠다는 것이었다. 김씨는 "6개월 정도 배를 타면 1,000만원에서 많게는 2,000만원까지 벌 수 있지만, 요즘은 이 일도 경쟁률이 높아졌다"고 전했다.
김씨의 고군분투는 '알바 시장'에서도 생존 경쟁을 벌여야 하는 대학생들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들의 소망은 절실하면서도 소박하다. "돈 걱정 없이 공부에만 집중해 보고 싶어요."
강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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