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 지음ㆍ윤정임 옮김/생각의나무 발행ㆍ520쪽ㆍ2만8,000원
인물론은 대개 위험하다. 동시대인을 호명할 때 특히 그렇다. 사람에 대한 품평처럼 저마다인 것도 드물어서, 인물론을 쓰면서 공정함의 미덕을 구현하기는 어렵다. 누군가를 부당하게 깎아내리거나 부당하게 추켜올림으로써 기껏해야 두 실존 간의 거리를 드러내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인물론이 우리를 매혹하는 건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만큼 그 자신을 잘 드러내는 거울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책이 앙드레 지드, 알베르 카뮈, 메를로퐁티, 앙드레 고르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문장 사이로 어김없이 비쳐보이는 건 글쓴이,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의 투명한 내면이다.
'사르트르가 만난 전환기의 사람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대의 초상> 은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시대정신의 표상으로 꼽은 동시대의 작가와 예술가들(르네상스 화가 틴토레토 제외)에 대해 비평한 글들을 묶은 책이다. 그 자신이 후대에 권해줄 만한 저서로 꼽은 <상황> 시리즈(총 10권)의 네 번째 책으로, 이 시리즈 10권 중 국내 번역된 것은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으로 나온 제2권과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라는 제목으로 나온 제5권에 이어 세 번째다. 식민주의와> 문학이란> 상황> 시대의>
인물론의 형식은 다양하다. 책이나 전시회의 서문일 때도 있고, 논쟁이나 제안에 대한 답변서 혹은 추도사일 때도 있다. 지성의 열기로 그때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공간, 20세기 중반의 파리에서, 사르트르는 당대의 많은 지성들과 친구와 적의 관계를 오갔다. 당대 지성의 내밀한 지형도를 보여주는 이 책은 그래서 앙가주망의 행동하는 지식인이 펼쳐보이는 예술ㆍ비평론이기에 앞서 지성들의 우정과 불화의 기록이자, 그들이 보내고 철회하기를 반복했던 우호와 지지, 갈등과 반목의 궤적이다.
책 속에서 가장 반짝이는 대목들은 사르트르와 우정을 회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카뮈와 메를로퐁티에 대해 쓴 부분. 잡지 '현대'의 편집진으로 함께 일하며 쌓은, 죽음이 아니면 버릴 수 없으리라 믿었던 현상학자 메를로퐁티와 사르트르의 우정은 한국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공산주의에 대한 의견이 갈리면서 부서졌다.
한밤중 거리에서 마주친 굳은 침묵의 얼굴이 메를로퐁티와의 마지막. 사르트르는 "그는 내 안에 고통스러운 상처, 후회와 자책과 약간의 원한으로 곪아터진 상처로 남아있다"며 "우리 둘은 서로 잘못 사랑했다"고 말한다. 노벨문학상쯤은 간단히 거부하는 이 강단(剛斷)의 지식인이 "완성되지도 와해되지도 않은 긴 우정"에 대해 쏟아내는 담담한 통한의 언어들이 슬프고도 아름답다.
사르트르는 소련 강제수용소의 실상을 언급하며 공산주의혁명을 '도덕적 반항'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한 카뮈와도 동지에서 적으로 돌아섰다. 책에는 자신에게 '잡지사 주간님 귀하'라고 비아냥거리며 격렬한 비난을 퍼부은 카뮈에게 사르트르가 보낸 답장, 카뮈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후 쓴 추도문, 두 편의 글이 실렸다. 책장에서 논쟁하고 비판하고, 불화하고 화해했던 세기의 지성들의 뜨거운 호흡이 배어나온다.
박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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