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이범수는 화려하지 않다. 꽃미남으로 꼽힐 만한 특출한 용모도 아니고 관객이 진저리를 칠 만한 인상적인 배역을 맡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무던하면서도 역할에 딱 떨어지는 연기로 관객에게 신뢰감을 줘 왔다. 조연으로 출발하여 10여년 만에 주연 자리에 오른 집념은 그의 타고난 연기력과 성실함과 연기에 대한 열정을 증명한다.
시골 중학교 여자 역도부를 다룬 영화 '킹콩을 들다'에서 역도부 감독 이지봉 역할을 맡은 그는 팬들의 기대에 화답한다. 서울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으면서도 축구 국가대표팀의 예선 탈락보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비인기 종목 선수로서의 비애와, 오합지졸 역도부원을 이끄는 감독으로서의 자애로움은 이범수의 몸 안에서 조화롭게 용해된다.
그의 연기는 스승과 제자의 사랑이 결국 눈물의 피날레를 맞는 '킹콩을 들다'가 그저 그런 3류 신파로 흐르지 않도록 무게중심을 잡는다.
연기라면 이골이 날 만도 한데 이범수는 "이지봉은 그 어떤 역할보다 힘들었다"고 했다. "이지봉은 올림픽 금메달을 따지 못해 패배감에 젖은 인물이면서도 강인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희극적이고 애잔하고 연민어린 모습을 동시에 보여줘야 했습니다."
현역 선수의 당당한 체구와, 부상당하고 은퇴해 낙향한 뒤 무너져버린 몸매를 동시에 보여줘야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역도 장면 찍은 다음날 바로 4년 후 모습을 찍었어요. 나중엔 살을 찌우긴 했지만 참 부담스러운 연기였어요."
역도 연습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로 혹독했다. 한달 반 가량 하루 8시간을 운동에 매달렸다. 오전엔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몸을 다지고, 오후엔 역도 자세를 가다듬었다. 콧물엔 피가 섞이기 일쑤였다.
식이요법도 뒤따랐다. 말만 들어도 속이 불편할 만큼 닭가슴살을 먹었다. 넉넉한 덩치의 역도부원 연기를 한 조안 등이 15㎏ 정도씩 살을 찌우기 위해 매번 고기로 배를 채울 때 그는 옆에서 탄수화물 강화를 위해 바나나를 먹었다.
몸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배우로서 맡은 배역에 대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어디까지인가"라는 존재론적 회의도 밀려왔다. 그래도 "거두절미하고 걷는 것부터 행동 하나하나, 어깨 모양, 팔 근육 등 모든 면이 딱 역도선수로 보였으면 좋겠다"며 욕심을 부렸다.
고통스러웠지만 역도를 하는 재미는 착 달라붙었다. 그는 목표치인 50㎏을 넘어서 80㎏을 들어올려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역도를 정말 단순한 운동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다 보니 재미있고 매력이 있어요. 내가 노력해서 목표한 무게의 바벨을 들어올렸을 때 짜릿한 희열이 느껴지더군요. 못 들었을 때는 오기도 생기고요."
그렇게 연습에 몰두하고 몸을 만들었건만 그의 역도경기 출전은 딱 한 장면으로 처리됐다. "두고두고 아쉬움은 남지만" 후회는 없다. "역도 장면이 악착같이 준비한 보람이 있다 생각할 정도로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불혹을 넘어 이지봉처럼 이제 남을 가르쳐야 할 나이가 됐지만 그는 최근 고려대 언론대학원에 진학, 방송영상학을 공부하기로 해 네티즌 사이에서 화제를 모았다. 이미 중앙대 예술대학원에서 공연예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시절부터 연기에 대한 갈망과 궁금증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많았습니다.
제가 지닌 전공 서적이 도서관보다 더 많다고 자부할 정도로 공부 욕심이 참 많았어요. 지금은 제가 이제까지 공부하고 익힌 지식과 기술을 하나의 체계 안에 정리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그게 이범수의 연기술이 됐든 이범수가 생각하는 연기가 됐든 제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전수하고 싶습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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