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OO씨 전화가 맞습니까? 저는 종로경찰서 이OO 형사입니다. 귀하의 은행 계좌가 전화 사기범들의 범행에 사용됐습니다. 아마도 유출된 개인정보를 입수해서 귀하 명의로 대포통장을 만든 것 같은데요, 귀하가 그 사기범 일당과 공범인지 아니면 단순히 명의를 도용 당한 피해자인지 지금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주부 김모씨는 아침에 늦잠을 자다 이 같은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이 형사는 앞으로 한 시간 안에 김씨가 자신의 무혐의를 입증하지 못하면 모든 금융자산을 동결할 것이라면서 팩스로 이 같은 내용의 가처분 명령서를 전송했다. 또 그 시간 동안 일시적으로 김씨의 통장 잔액의 80%를 금융감독원 직원의 계좌로 신탁해 두어야 한다며 계좌번호를 불러줬다.
김씨는 정신없이 가까운 은행에 가서 계좌이체를 했지만, 뒤늦게 '전화사기를 당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긴급히 돈을 보낸 은행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이미 사기범들은 돈을 모두 인출한 뒤였다.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에 꼼짝 없이 당한 것이다. 법무부장관의 서명까지 돼 있는 조잡한 가처분 명령서는 당연히 가짜였다.
전화사기, 누구나 걸려들 수 있다
보이스피싱 방법이 날로 교묘해지면서 경찰청과 금융감독원 등 관계 기관들의 각종 대책에도 불구하고 피해 건수 및 액수가 날로 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07년 3,971건 433억원 가량이었던 피해 규모는 지난해 7,671건 809억원으로 급증했다. 올해 1분기까지 피해 규모 역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훨씬 많다.
전화 사기범들은 초창기에는 보험금이나 연금, 세금을 환급해 주겠다며 유인했지만 이후 자녀 납치 협박, 반송 우편물 처리 등으로 내용이 바뀌더니 최근에는 "사기사건에 연루됐다"면서 불안감을 조성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에 따라 피해자들이 물정 모르는 노인들 위주에서 회사원은 물론 대학교수, 판사, 의사 등 '도저히 당할 것 같지 않은' 사람들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평소 건강보험공단이나 우체국 등을 사칭한 사기 전화는 쉽게 물리치던 사람들도 그럴 듯한 시나리오에 종종 걸려드는 것이다.
현금지급기로 유인하면 100% 사기
전화 사기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우선 어떤 핑계를 대든지 현금입출금기로 유인하면 일단 사기라고 생각해도 좋다. 이들이 주로 사칭하는 우체국, 검찰, 경찰, 국세청, 건강보험공단 등등의 공공기관은 절대로 현금지급기로 돈을 이체하라는 내용의 전화를 하지 않는다.
"전화가 녹음되고 있다"며 끊지 못하게 하는 것도 사기범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전화를 끊고 실제 자신들이 사칭한 기관에 확인전화를 걸지 못하도록 피해자를 몰아세우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사기가 의심되면 초반에 전화를 끊어야 한다. 어느 정도 통화를 하다보면 상대방의 말솜씨에 말려들 수 있다.
ARS로 걸려 온 전화는 바로 끊는 것도 사기 피해를 예방하는 방법이다. 선거철 여론조사 등을 제외하면 ARS로 전화를 거는 곳은 대부분 사기범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이스피싱 범죄를 다루는 수사과 지능팀에 근무하는 경찰관들은 "ARS 전화를 아예 금지하기만 해도 많은 피해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피해를 당했다면 신고해야
만약 돈을 사기범들에게 이체하고 피해를 입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대한 빨리 돈을 이체한 은행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 지급정지를 신청해야 한다. 물론 사기범들은 통장에 돈이 들어오면 대기하고 있다가 즉시 인출해 버리지만, 범인들이 돈을 빼내기 전에 재빨리 지급정지를 신청해 막은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일단 돈이 빠져나갔다면 되찾을 방법은 별로 없다. 전화사기범들은 주로 중국 등 제3국에 거점을 두고 있기 때문. 그래도 관할경찰서에 신고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범행에 이용된 범인들의 '대포통장'이 또 다른 사기에 이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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