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모계사회로 회귀했다. TV 사극을 보면 확실하다. <선덕여왕> <천추태후> <자명고> , 제목부터가 다 여자들이다. 갑옷을 입고 말 위에서 칼을 든 여성 영웅들이 매일 밤 안방을 누빈다. 하나같이 고귀한 혈통이다. 눈부시게 아름답다. 무예에 능하고 어떤 고난도 헤쳐 나갈 만큼 의지도 굳다. 자명고> 천추태후> 선덕여왕>
그들을 흠모하고 따르는 멋진 남자들도 거의 소대 병력은 된다. 주부들은 드라마에서 실현된 자신들의 판타지에 감동하고, 남자들은 이 현대의 여신들에 홀려 여전히 DNA 깊숙이 잠복해 있는 모계사회에 대한 향수를 달랜다.
'강한 여성'은 불황기 신드롬
이야기의 큰 틀은 남성 주인공의 영웅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웅의 특별한 탄생, 유배, 고난과 회귀 그리고 궁극적인 승리이다. 그리스, 로마에서부터 중국, 인도 심지어 아프리카 원주민의 설화까지 세상 어느 곳이나,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이야기이다. 이런 면에서 세 드라마의 이야기 구조는 거의 같다.
무슨 상관이겠는가? 인류의 모든 이야기는 신화의 반복인데 말이다. 영웅의 승리라는 궁극의 결론으로 가는 과정에서 대항자(Antagonist)의 숫자나 비중을 어떻게 다루고, 연애담과 클라이맥스의 관계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이 연속극들의 회수는 조절된다. <선덕여왕> 의 미실처럼 확실한 캐릭터의 대항자가 있고, 연애담이 애절할수록 시청률은 오른다. 선덕여왕>
단지 다른 것은 이번에는 주인공들이 여성이라는 것이다. 사극은 오랫동안 남성적 판타지의 전유물이었다. 고대의 벌판을 내달리며 단숨에 적을 도륙하는 영웅들의 모습은 한국 방송사들이 나날이 엄혹해지는 시청률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 만들어낸 가장 확실한 브랜드였다. <주몽> 이 그랬고, <대조영> 이 그랬고, <이산> 이 그랬다. 그런데 이제는 여성 영웅들이다. 같은 시기의 방송 3사의 사극 전부가 그렇다. 우연이라면 참 희한하다. 이산> 대조영> 주몽>
TV 드라마는 일상적으로 재생되는 현대의 신화이다. 신화는 우리 무의식에 내재된 집단적 충동이고,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고 불가해한 세상을 해석하려는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갑자기 우리 앞에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한 이 여성 영웅들의 생산과 소비, 유통과 담론의 과정에 잠복하는 우리의 집단적 징후는 무엇인가?
단서의 하나는 아마조네스 공포이다. 강한 여자들에 대한 남성들의 근원적인 공포이다. 불황에 많이 나타나는 증상이란다. 실업과 사업 실패로 남성의 가장 기본적 능력인 경제력을 잃어버린 가장들이 갑자기 확인하게 되는 남성의 무력함, 왜소함이 여성에 대한 공포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세계 영화사상 가장 강한 여인들이었던 필름 느와르 속의 팜므 파탈,'치명적 여인들'이 등장한 시기도 경제공황이 미국을 휩쓸던 무렵이다.
남자 전업주부도 괜찮다고 말하는 건 정신적으로 지나치다 싶을 만큼 건강한 것이다. <선덕여왕> 에서 미실 고현정의 발을 닦아주는 정부를 보면서 혹시 조금이라도 부러웠다면 이 아마조네스 공포의 징후가 몸 속의 모계사회 동경 유전자를 자극한 것이다. 선덕여왕>
무력한 남성들의 모계사회 동경
기러기 아빠들을 남성적 판타지의 시선으로 보면 이 아빠들은 세계를 정복하는 징키스칸의 병사들이다. 그들은 가족과 같이 살지 않는다. 말을 타고 전 세계를 정복하면서 노획한 재화와 노예들을 수 만리 떨어진 집으로 보낼 뿐이다.
거기서는 자신들의 전쟁을 이어나갈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그러나 여성적 판타지의 시선으로 보는 그들은 대모가 거주하는 집에 필요한 재물과 양식을 열심히 벌어 보내는 모계사회의 구성원일 뿐이다. 가끔씩 전화선을 통해 전달되는 대모와 아이들의 격려에 감동해 눈물까지 짓는 걸 보면 아무래도 여성적 시선이 더 맞는 듯하다.
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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