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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아내가 '나가 놀아라'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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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아내가 '나가 놀아라'고 하면

입력
2009.06.23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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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사장으로 은퇴한 선배의 이야기다. 은퇴하던 날, 느닷없이 아내가 고마워지더란다. 이토록 영예롭게 은퇴하는 것이 다 아내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와 지방을 전전하느라 가족과 함께 지낸 날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도 자식들이 번듯하게 자라준 것은 다 아내 덕분이다. 선배는 그날 결심했다. 나머지 세월은 아내를 위해 살겠다고.

지금 함께 행복한 경험을

그날 이후 선배는 아내와 국내외 여행, 골프여행을 쉬지 않고 다녔다. 젊은 시절 고생한 만큼 그 정도 여유는 있었다. 백화점에서 아내의 핸드백을 들고 아내가 사고 싶은 옷을 결정할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스커트 하나 사는데도 아내의 결정은 여전히 오래 걸렸다. 이전 같으면 이내 짜증내고 돌아 섰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손잡고 다니는 것은 아직 어색했다. 그러나 그다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아내도 즐거워하는 듯했다. 아,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구나. 이런 노후가 있으려고 내가 그렇게 고생했구나. 이런 생각도 자주 들었다.

그렇게 한 석 달이 지났다. 어느 날 아침식탁에서 갑자기 아내가 진지한 얼굴로 할 말이 있단다. 그리고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 이제 좀 혼자 나가서 놀 수 없어?" 아내의 생각은 달랐던 거다. 평생 고생한 남편을 위로하느라 참고 함께 다녔던 거다. 하나도 재미가 없었지만 참고 따라다녔을 뿐이었다. 선배는 내 앞에서 한숨만 푹푹 쉬었다. 이제 어쩌면 좋으냐는 거다. 회사가 있고, 함께 몰려다닐 동료가 있을 때는 이런 아내의 푸념 정도야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아내와 앞으로 적어도 30년은 더 살아야 한다. 흔히들 착각한다. 열심히 일하면 나중에 행복해질 거라고. 그러나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나중에도 행복해질 수 없다. 도대체 행복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행복해질 것 아닌가. 아내와도 마찬가지다. 함께 행복한 기억이 있어야 행복해질 것 아닌가? 경험도 없고 방법도 모르는데, 어찌 갑자기 행복해지겠는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카네만 교수는 행복을 아주 간단히 정의한다.

기분 좋은 시간이 길면 길수록 행복하다. 부부도 마찬가지다. 동네어귀를 손잡고 산책하거나 노천카페에 앉아 함께 커피를 마실 때 기분 좋았다면 그 일을 반복하면 된다. 팔짱 끼고 음악회를 가는 일도 추천할 만하다. 잘 차려 입은 아내를 본 기억이 정말 오래되지 않았는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행복할 것이라는 강박에서도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따로 또 같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죽을 때까지 정말 무엇을 좋아하는 지 모르고 죽는 사람이 태반이다. 재미에 대한 환상을 버리면 된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재미만 기대하니 소소한 일상의 재미를 잃고 산다. 세상이 자주 뒤집어지지 않으니 폭탄주로 내 속만 자꾸 뒤집는 거다.

혼자서도 즐길 줄 알아야

내 친구는 새소리 듣는 게 그렇게 재미있단다. 소리만 듣고 50종류의 새를 구별할 수 있다. 새소리만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기분 나쁘면 새소리 들으러 가면 된다. 언제든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세상은 온통 재미있는 일 천지다. 다 늙어서 '나가 놀아라'는 말을 듣기 전에 내 좋아하는 것부터 분명해 해야 한다. 그래야 아내도 나를 귀찮아 하지 않는다. 내가 재미있어야 아내도 함께 있는 것을 행복해 한다. 자, 그럼 이번 주말 한번 놀아볼까. 혼자서, 재미있게. 자신 있는가?

김정운 명지대 교수ㆍ문화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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