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00여명의 유엔군(미국ㆍ프랑스) 연대 병력으로 중공군 8개 연대 2만명(중국측 자료)에 포위된 채 치른 전투.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승리한 최초의 방어전투. 패퇴하던 유엔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는 신호탄이 된 전투.
한국전쟁사는 1951년 2월13~15일 경기 양평군 지평리에서 벌어진 '지평리 전투'를 이렇게 적고 있다. 전사에 빛날 전투지만 당시엔 생사가 한 순간에 갈리는 극한 상황일 뿐이었다. 지평리 진지에서 열 아홉 살 생일(2월4일)을 맞았던 기관총 탄약수 도널드 바이어스 일병은 "뼈 속까지 시렸던 추위" 속에 맞이한 전투를 이렇게 기억했다.
"눈 앞으로 200, 500, 1,000명의 중공군들이 진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첫날 밤새 기관총 최대 장전량인 5만발을 모두 쐈다." "같은 중대 기관총 사수였던 동료의 마지막 모습은 돌격하는 중공군을 향해 참호 밖에서 '권총'을 발사하는 것이었다."
23일 백발의 노병이 된 바이어스(77ㆍ예비역 중령)씨가 다시 지평리를 찾았다. 그가 가장 만나고 싶어했던 이건재(62)씨가 그를 맞았다.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씨 손엔 20여년 전에 찍은 사진 한 장이 들려 있다.
이씨의 아버지 이용철(92년 작고)씨와 바이어스씨가 낡은 농가 앞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다. 바이어스씨는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사진을 매만지며 "참호에서 나와 잠시 이 빈 집에서 지친 몸을 기대고 불을 피워 몸을 녹이곤 했다"고 회상했다.
"그럼 집세를 받아야겠네요." 이씨가 농을 건네자, 바이어스씨도 맞받는다. "여러 병사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사용했는데요." 생전 처음 마주한 둘은 그렇게 마음을 열었다.
바이어스씨는 50년 10월 20일 한국에 배치됐다. 미 2사단 23연대에 배속돼 압록강까지 북진했다가 중공군에 밀려 내려와 청천강 전투, 지평리 전투를 치렀고 51년 3월 1일 부상을 입어 일본으로 후송됐다.
장교가 되어 87년 다시 한국에 부임한 그는 지평리로 달려갔다. "수소문 끝에 겨우 그 집 주인을 만났습니다. 같이 소주도 마셨고요. 집 근처 산등성이에 있던 내 참호 흔적도 찾았지요."
이날 이건재씨와 함께 찾아간 그 때 그 집은 행랑채와 대문, 창고만 일부 남은 채 대부분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이씨 부친이 작고한 뒤 오래 비워둔 탓이다. "참호 위치가 저기 위쪽인데…." 바이어스씨가 옛 기억을 더듬느라 애를 썼다.
바이어스씨는 한국전쟁 발발일을 즈음해 국가보훈처와 재향군인회가 마련한 참전용사 재방한 행사로 한국을 찾았다. 그를 다시 지평리로 이끈 곳은 '지평리를 사랑하는 모임'(지평사모)이다. 지평리 전투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널리 알리고 있는 지평사모는 내년엔 미군과 함께 피를 흘렸던 프랑스군 참전용사를 초청할 계획이다.
바이어스씨는 이날 지역 주민들과 지평사모 회원들 앞에서 지평리 전투에 관한 강연도 했다. 굶주리던 많은 어린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그 나라가 자기 생전에 이렇게 발전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고 했다.
"지금의 한국을 지켜보노라면 나와 동료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해 보냈던 시간과 바친 희생이 충분히 보상이 됐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인들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는 강연 자료에 당시 전투에서 전사한 23연대 모든 전우들의 명단을 적어 왔다. 포로 수용소에서 숨진 전우를 포함한 62명의 이름과 계급이 빼곡했다. "지평리에서 목숨을 잃은 용감한 프랑스 군인들도 있었는데 그 분들의 명단을 갖고 있지 못해 아쉽습니다."
당시 지평리 전투에서 미 23연대는 52명 전사, 42명 실종, 259명 부상의 피해를 입었다. 증원 병력이었던 미 5연대는 전사 19명, 실종 19명, 부상 40명. 중공군 전사자는 5,000여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16개국의 전사자는 4만600여명에 달한다. 모두 역사책 속 숫자로만 남기에는 너무 무거운 삶들이다.
바이어스씨는 23연대 소속 군인 중 아직까지 9명이 생존해 있다고 소개했다. 이들은 해마다 미국에서 모임을 갖고 있다. 그는 11월에 열릴 올해 모임에서 이날 지평리를 다시 찾은 얘기를 전우들에게 전할 수 있게 됐다며 웃었다.
양평=진성훈 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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