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숙(43)씨의 세번째 소설집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문학동네 발행)는 소설로 지은 허무의 영토다. 수록작 9편의 인물들은 도시에서의 권태로운 일상을 하루하루 견뎌가는 이들이다. 빨강>
실연은 이런 인물들이 풍기는 허무와 외로움의 알리바이다. 5년 동안 사귀어온 애인과 헤어진 여성('갈색 눈물방울'), 유부남 직장상사와 클럽에서 만난 외국 남성 등 이 남자 저 남자를 사귀지만 누구에게서도 정착감을 느끼지 못하는 여성('안토니오 신부님'), 어려서부터 사귀어왔던 남자와 교제에 실패한 여성('스쿠터 활용법') 같은 이들이다.
실연을 경험한 인물들이 스스로를 위무하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고도 슬프다. '애들아, 나 지금 골로간다'며 친구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죽은 엄마의 두꺼운 스웨터를 몸에 걸치고 집 앞마당에서 하늘을 멀뚱히 바라보거나, 전신 수영복을 입은 채 대학운동장에서 조깅을 하는 식이다.
"나는 연애소설을 쓰는 일이 낯설다. 깨진 인간관계를 담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소설 속 인물들의 우스꽝스러운 행태는 관계맺기에 실패하고 깊은 허무감에 사로잡혀 있는 도시인의 전형이다.
비록 실연의 아픔을 겪지 않았지만 아침마다 "도대체 이 도시에 테러는 왜 안 일어나는거야"라고 중얼거리거나 벗은 채로 집안을 돌아다니는 여자('령'), 하루 한 끼는 함께 먹자는 엄마의 제안에 머리를 가랑이 사이에 집어넣고 "꼭 같이 먹어야 합니까?"라고 반문하는 아들('천변에 눕다')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허무에 사로잡혀 미쳐버릴 것 같은 도시인의 심리를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수록작 9편 가운데 5편은 강씨의 2006년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리나> 이후 발표한 작품들. 지독하게 차갑고 냉소적인 인물을 창조해 문단의 화제가 됐던 <리나> 에 에너지를 다 쏟았다는 작가는 " <리나> 이전의 소설을 읽었던 독자들에게는 이번 작품들이 좀 심심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소설집 전체적으로 큰 사건들은 사라지고 일상의 무의미함을 돌파하려는 인물들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리나> 리나> 리나>
2007년에는 6개월 간 일본 도쿄에 체류했던 작가는 "일본 작가들에 비해 우리 작가들은 큰 이야기에 강하지만, 소박하고 사소한 일상을 그려내는 데 약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복잡한 한국사회의 현실은 하나의 컬러로만 따라가기 힘들다. 이번 소설집 역시 출구를 찾으려는 내 나름의 몸짓"이라고 말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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