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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몸과 삶, 그리고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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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몸과 삶, 그리고 민주주의

입력
2009.06.23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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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공학도다. 1980년대 대학 시절을 보내면서도 정치에는 거의 무관심했다. 심지어 학생 운동하는 친구들을 사치스럽다면서 비난까지 했다고 한다. 결혼하고 유럽 유학을 다녀온 후에도 여전히 정치에 무관심했다. 지난해 전국을 달구었던 촛불 시위나 올해 6월 항쟁 기념집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달라진 모습이 있어 보였다. 정치적 판단과 표현양식에 있어서다. 아내는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있다고 분명히 주장했다.

'생활 민주주의'의 위기

이런 변화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는 민주주의 이념을 열심히 공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보았을 뿐이다. 민주주의 환경에 적응한 나머지 최근 한국적 상황에 불편함을 적지 않게 느끼고 있었다. 전형적인 정치맹(盲)인 아내가 '생활 민주주의자'로 변신한 것이다.

자주 사용하지 않는 체득(體得)이라는 단어가 있다. 글자 그대로 '몸이 익힌다'는 의미다. 몸은 주위 환경에 자율적으로 적응하는 독특한 기제를 갖고 있다. 낯선 환경에서 당황하는 것은 바로 우리 몸이 반응한 결과다. 민주주의를 생활화한다는 것도 동일한 이치다. 민주주의 원리와 가치가 완벽하게 구현된 상태는 그 것이 우리 몸에 자연스럽게 녹아 든 경우다.

아내는 유럽 생활을 통해 형성한 '민주주의적 몸'을 갖고 다시 한국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최근 부쩍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은 '민주주의 몸'에 맞지 않는 '상황이라는 옷'을 입은 탓이다. 시위하는 시민의 머리를 경찰이 방패로 찍는 모습에 아내의 몸엔 공포-전율-분노-역겨움이 동반한다.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자유도 결국 우리 몸과 1차적 관계를 맺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Merleau-Ponty)는 <지각의 현상학> 이라는 흥미로운 저작에서 "자유는 이념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삶을 지탱하는 '몸스러움'에 있다"고 말했다. 전혀 정치적이지 않아 보이는 '몸 철학' 연구자가 왜 정치적 행동주의자였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인권이나 평등과 같은 이념도 우리의 몸이라는 실존적 차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이념과 제도의 차원에 머물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를 제도화, 형식화하는 차원과 공동체 구성원이 체득하는 차원 사이엔 넓은 간극이 존재한다. 민주주의의 생활화가 제도적 장치보다 늦다는 말이다. 귀동냥으로 들은 정치철학적 개념인 '지체된 민주주의'는 이를 가리킨다. 최근에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자신의 책 제목으로 삼은 <후불제 민주주의> 도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나 성문헌법은 미리 주어진 것에 불과한 반면, 이를 지켜나가는(체득하는) 데는 필연적으로 희생이라는 대가가 따른다는 말이다. 민주주의 이념은 쉽게 이해될 수 있을 정도로 얇지만, 체험에 기반을 둔 생활 민주주의는 두껍다.

'민주주의적 몸'이라는 의미는 민주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도 우리 몸이 자율적으로 적응할 수 있다는 역설을 품고 있다. 억압적 체제 속에서도 몸은 나름대로 적응한다는 말이다. 이렇듯 몸이 지니는 가치중립적 속성 때문에 민주주의적 환경에 대한 가치판단이 쉽지 만은 않다. 그래서 민주적이지 않은 환경을 쉽게 감지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환경에서 형성한 몸을 리트머스로 실험하면 간단하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시대가 선물한 학습기회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 중인 추신수 선수가 시위현장을 봉쇄한 경찰차 행렬을 부끄럽게 생각한 것도 민주적 환경에서 형성한 자신의 몸의 표현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선진국에서 살아보지 않은 대다수 우리 국민은 지금 다행히 시간적인 간극을 두고서 서로 다른 정치 환경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 몸이 얼마나 다르게 반응하고 있는지에 대해 차분히 살펴보는 것은 아마도 현 시대가 '선물한' 소중한 학습기회로 보인다.

조상식 동국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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