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 마이크 시험 중.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안녕하세요. 통장입니다."
지난 15일 오전 서울 강동구 암사동의 서원마을. 통장 이숙희(55)씨가 오랜만에 마이크를 잡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확성기를 이용한 '동네 방송'으로 반상회 공지를 하기 위해서다.
"25일 반상회 있는 거 다 아시죠? 많이 참석하셔서 얼굴들 좀 봤으면 좋겠어요. 이번에는 지난달 딸 결혼식에 많은 분들 와주셨다고 자치회장님이 맛난 음식을 돌리신답니다."
잠시 뒤 이웃 정정성(48ㆍ여)씨가 파, 상추를 한 소쿠리 들고 이씨를 찾았다. "방송 나오길래 집에 계신 줄 알고 왔어요. 집 마당에서 키운 건데 드셔 보세요. 완전 무공해예요, 무공해. 호호." 두 사람은 가족들 얘기며, 동네 사람들 얘기로 오전 내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64가구 300여명이 모여 사는 서원마을. 바로 옆으로 올림픽대로가 지나고, 차로 3분만 가면 지하철역도 있는 전형적인 서울의 주거지역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모두가 마당에 텃밭을 가꿔 채소를 기르고, 생필품을 살 땐 신용카드 결제는 안 돼도 외상은 되는 '서원슈퍼'를 이용한다.
또 공동명의로 돼 있는 마을 내 자투리땅 990㎡에 창고 등을 짓고 임대 수익으로 동네기금을 만들어 텃밭 농사에 쓸 농약도 사고, 마을 노인들 단체 꽃놀이 여비에도 보탠다. 이씨는 "마을 뒷산만 가도 꿩을 볼 수 있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여름철에 에어컨이 필요 없다"며 "행정구역만 서울이지 고향에서 사는 것하고 똑같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스스로를 "서울 속 시골에 산다"고 말하는 서원마을 주민들. 이들이 서울에서 으뜸가는 개인주택 마을 만들기에 도전장을 냈다.
서원마을은 지난해 12월 성북구 성북동(300번지 일대), 강서구 개화동(452번지 일대), 강북구 인수동(532번지 일대)과 함께 서울시가 추진하는 '살기 좋은 마을' 시범사업 지역에 신청해 선정됐다.
'살기 좋은 마을'은 개인주택이 잘 보존된 지역 가운데 재건축과 재개발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곳을 대상으로 서울시가 시설 개량을 지원해주는 사업이다. 서울 전역에서 고층 아파트 일변도 개발이 이뤄지면서 개인주택이 급속히 사라지는 것을 막아보자는 취지다.
서원마을 주민들이 개인주택 지키기를 결정한 까닭은 역시 '참살이'다. 같은 값으로 좁은 아파트보다는 넓은 곳에 살면서 삶의 여유를 즐기며 건강도 챙기는 게 낫다는 것이다. 김삼달(55) 주민발전위원장은 "서울에서 중형 아파트 살 돈으로 우리 마을에 오면 큰 정원 딸린 집에서 살 수 있다.
환경이 좋아 아이한테 아토피가 있는 가족이 전세를 들어오기도 한다"면서 "매일 아파트 가격이 오를까 내릴까 마음 졸이며 불편하게 사는 것보다 이게 훨씬 행복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하지만 주민들이 '남들과는 다른' 결정을 내리기까지 어려움도 많았다. 특히 상수원보호구역과 그린벨트가 인접했다는 이유로 재산권을 침해 받아왔다고 생각하는 주민들을 설득하는 것이 숙제였다.
"1979년 취락지구개선사업으로 마을이 생길 때만 해도 양옥집에 마당까지 있는 신식 주거생활 '본보기'였어요. 30년 동안 서울의 다른 지역에선 헌 집 부수고, 아파트 지어 부자되는 동안 우리만 그대로였던 거죠. 대부분이 최소 10년 이상 산 사람들인데, 그동안 솔직히 재개발, 재건축하자는 말이 없었겠어요?"(이숙희씨)
'살기 좋은 마을' 시범사업 신청을 두고 주민들 의견이 나뉘자, 이씨와 김 회장 등 대표들이 주민들의 위임을 받아 사업 신청에 따른 장단점을 직접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난해 8월부터 두 달간 서울시청과 강동구청에 수시로 들르고, 도시개발 전문가들을 쉼 없이 만났다. 난생 처음 보는 마을의 '도시계획도'를 들고 지도 보는 법을 배우고, 여러 기관들과 관련 법령의 유권해석 질의ㆍ답변서를 주고 받은 것도 수십 차례였다.
이들은 결국 사업을 신청하기로 결정하고, 10월 반상회에서 주민들의 동의를 구했다. 반대하거나 반신반의하는 주민들은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설득하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현재 주민들은 다음달로 예정된 '살기 좋은 마을' 공청회를 준비하고 있다. 공청회는 시범사업 지역으로 선정된 후 서울시와 4차례 워크숍을 열며 논의한 마을 발전 방안 등을 점검하는 자리다. 서울시는 이를 바탕으로 9월까지 지원 계획을 최종 확정한다.
김 회장은 "담장 허물기와 블록별로 집 지붕과 외벽을 같은 색으로 꾸미기, 전선을 땅속으로 묻고 전봇대를 없애는 지중화 사업 등 외부환경 개선을 먼저 추진할 계획"이라면서 "향후 마을규칙 같은 것을 마련하는 등 주민들이 예전보다 더 가깝게 지낼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찾아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무 기자 abcdef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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