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년을 맞아 여유시간이 좀 생긴 차에 호스피스 교육에 참여하게 되었다. 커다란 기대를 건 것은 아니고, 죽음과 친해지면 좀 더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직은 죽음과 먼 사이'라고 믿는 미련한 자의 작은 소망 정도를 가졌다. 교육을 통해 내가 재확인한 것은 나는 이미 죽음으로의 행로에 있으며 삶의 종착역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넘어
내일을 멋지게 살기 위해 오늘 노력하는 것처럼, 언젠가 내일이 될 마지막 날을 위해 무언가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물론 마지막 날에 대한 인식을 통해 오늘을 귀하게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 삶을 통제하고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취지에서 나는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하였다.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억지로 상상해야 한다면, 살 만큼 살다가 어느 날 자다가 편안히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그려보고 싶어질 것이다. 딱딱한 침대에 누워 생명유지장치로 연명하는 자신을 상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공 영양공급 튜브에 의존한 채 식물인간 상태로 15년간 누워있던 미국의 테리 시아보를 자신이라고 상상해 보라. 의미 없는 연명치료에 대한 이슈가 단지 남의 일로만 생각될 수는 없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식물인간 상태인 어머니에 대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 달라며 자녀들이 병원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법원이 가족의 손을 들어줬다. 환자의 상태가 회복 가능적이지 않고 생명연장 치료를 받지 않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했다는 환자의 평소 소망이 추정 가능하다는 데 근거한 결과였다.
존엄사와 관련하여 환자의 소생 가능성 판단과 환자나 가족들의 결정권 인정 여부는 가장 큰 쟁점이다. 소생 가능성의 판단주체와 그 기준 등에 대한 논의는 상당한 의학적, 법률적 지식을 요하는 영역이므로 나의 지식수준 밖에 존재한다. 하지만 환자나 가족의 결정이라는 부분은 나 또한 그런 환자 또는 가족일 수 있다는 점에서 무언가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환자가 의식이 있을 때 자신이 어떤 의료적 처치를 받기 원하는지 명확히 문서화해 놓는다면 문제는 보다 간단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여러 환자들은 이런 절차 없이 회생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게 되고 의미 없는 연명치료 속에서 본인과 가족의 고통이 가중된다. 회생 불가능한 말기 환자에 대한 연명치료는 "삶의 연장이 아니라 임종과정의 연장"이라던 어떤 의사의 말이 기억 난다.
환자가 의식불명 상태에 있을 경우 가족과 친지들에게 환자가 평소 말한 연명치료 거부가 고려될 수 있지만 말의 내용이 모든 가족원들에게 일관되게 이해되고 가족원들이 동일한 치료방법에 합의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연명치료를 중단시키려던 테리 시아보의 남편과 유지시키려던 부모 사이의 치열한 법정투쟁이 이러한 가족 갈등의 가능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자연스런 죽음에 대한 의지를 환자가 평소 표시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환자가 아닌 가족의 입에서 나온 결정은 가족원들에게 정신적 부담을 지울 수 있다. 부모님 돌아가신 후 이런 치료도 더 해 볼 걸, 저런 것도 해 볼 걸 하는 자녀들의 후회가 담보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자녀들 스스로 불효를 의심하고 타인의 눈총을 의식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전의료지시서 통한 선택
사전의료지시서는 자의적 의사표시가 불가능해질 경우를 대비해 나를 치료하는 담당의사와 가족들에게 남기는 내가 소망하는 치료방식에 대한 지시서이다. 이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자율권 행사이며 존엄한 삶에 대한 자기보장이다. 내 생명에 대한 결정을 가족에게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끝까지 통제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임종과정을 통해 삶을 완성할 수밖에 없다고 할 때, 이 순간을 어떻게 고통 없이, 내 삶의 방식대로, 존엄하게 맞을 수 있을지 고민해 볼 만하다.
홍순혜 서울여대 사회복지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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