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로루시와 러시아 출장을 다녀왔다. 아직도 벨로루시의 너른 땅과 푸른 호수, 순박한 백러시아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거리 곳곳에서 표트르 대제와 예카트리나 여제가 일구었던 러시아 문화의 정수와 깊어 가는 백야(白夜)에 보드카와 발레를 즐기던 러시아 사람들의 열띤 감성이 인상적으로 기억된다.
이번 출장은 외국 박물관에 설치된 한국실의 현황 파악과 외국에서 우리 문화재를 전시하는 기획전시의 세부 협의를 위한 것이었다. 첫 일정은 벨로루시 국립박물관에서 시작되었다. 공식적인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나면 스스로 포상이라도 하듯 현지를 둘러볼 기회를 만들곤 하는데, 이번에도 민스크 시내를 둘러볼 요량으로 일행과 함께 길을 나섰다.
그런데 민스크의 도시 경관은 크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천편일률적인 모습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히틀러와의 전쟁 때문에 모스크바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민스크는 공습과 시가전으로 도시 전체가 철저히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내 관광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행선지를 바꾸어 큰 박물관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전쟁사 박물관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치열했던 전쟁 상황과 그 무대의 중심에 섰던 벨로루시 혁명군의 모습을 무기, 사진, 모형으로 보여주는 곳이었다. 전시를 둘러보는 가운데 단위부대의 활동상황과 함께 부대원의 사진을 앨범처럼 모두 패널에 담아둔 모습이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훈련과 전투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수행한 병사들, 전쟁 속에서도 피어난 사랑과 갈등, 화합과 반목의 곡절들이 뒤엉킨 가운데 나도 어느새 1941년의 벨로루시에 서있는 듯했다. 역사 속 치열하게 살았던 개인의 '삶'을 발굴해낸 전시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다음 일정으로 방문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곳에서 2010년 6월에 개최될 '한국의 보배' 기획전 협의를 마치고 가이드와 함께 전쟁홀(war gallery)을 돌아보았는데, 무려 200년의 시간을 쉽게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을 하였다.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친 쿠투조프 원수와 그의 부하장교 322명의 초상화를 살펴보면서 현대 러시아 사람들과 같은 고민과 사랑, 전쟁에 임하는 모습들이 되살아 났다.
비록 전쟁의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전쟁을 끝낸 후 느꼈을 자부심과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러시아 군대의 조직과 구성, 그리고 심지어 그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작전회의를 거듭하던 모습이 마치 환영처럼 살아났다.
한국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기획전시'와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 두 박물관에서 사진과 초상화로 '개인의 삶'을 살려내는 전시를 하지 않았더라면 관람객이 쉽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동화(同化) 혹은 일체화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공감이 없는 전시는 그저 사물의 나열에 불과하고, 전시가 그려내려던 역사적 사건은 '화석'에 다름 아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시간대별 흐름과 변화를 제시하는 정치사, 문화사, 생활사 중심의 전시에서도 사진, 그림, 기록을 통해 개인의 삶 혹은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복원해낸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과거의 시간을 쉽게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또한 발굴된 과거 속 개인은 역사와 문화의 틀에 가두어진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살아가면서 문화를 만들어내고 역사에 참여하는 능동적인 주체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유병하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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