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중에 들어온 물건을 잘 버리지 않는 탓에 친정이나 집 곳곳에서 케케묵은 물건들이 발견되곤 한다. 20년도 넘은 가격표 떼지 않은 공책에서 30년도 더 지난 하모니카까지. 아이를 데리러 친정에 들렀을 때였다. 아이가 뭔가에 발을 올려놓고 질질 끌며 다니고 있었다. 30년 가까이 된 내 주판이었다. 주산은 뒷전이고 나도 저렇게 주판에 발을 올려놓고 롤러스케이트처럼 밀며 다녔다.
그때 아이들 사이에 주산학원이 인기였다. 텔레비전 묘기 프로에 주산 신동이 등장해 경력 수십 년의 은행원과 한판 대결을 벌였다. 주판과 계산기의 대결이기도 했다. 그 어떤 어려운 연산도 신동이 이겼다. 학원에만 다녔지 연습은 뒷전이어서 실력은 늘 그 자리였다. 주판은 이럴 때도 요긴했다. 답이 틀리거나 딴청을 하다 걸리면 주판 선생님은 주판알 쪽으로 아이들의 이마에서 뒤통수까지 드르륵 긁었다.
숫자를 부를 때면 요상해지던 선생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이 세상의 주판이 사라지기를 바랐다. 주산은 생각보다 빨리 사라졌다. 제발 좀 버려라. 어머니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슬그머니 가방에 주판을 넣어 왔다. 어디에 쓸까. 툭툭 발에 밟혔는데 얼마 전부터 요긴하게 쓰고 있다. 아침 운동으로 시작한 백팔배. 횟수를 헤아리다 늘 잊어버리기 일쑤였는데 절 한 번에 주판알 하나씩, 주산은 살아 있다.
소설가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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