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살아 있는 권력과 맞선 적이 있다. 참여 정부 5년 내내 검찰은 권력과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국민 신뢰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후 검찰은 180도 달라졌다. 검찰의 힘은 권력이 아니라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사실과 과거의 경험을 몽땅 잊었다.
그 정점에서 박연차 게이트가 터졌다. 과거 정권에 대한 수사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검찰은 무리수를 두었고, 불행하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라는 예기치 못한 비극을 낳고 말았다. 검찰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표적ㆍ짜맞추기ㆍ편파 수사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대검 중수부 폐지 요구도 거세다. 왜 검찰은 권위주의 시절의 검찰로 회귀했을까. 검찰을 신뢰하기란 더 이상 어려운 것일까. 작금의 상황은 참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감시ㆍ견제 받지 않는 사정권력
권력은 언제나 검찰을 손에 쥐려 한다. 검찰을 통해 합법적으로 특정 정치세력을 견제하거나 사회를 통제하면서 국정을 원하는 방향으로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권의 이념이나 지향점과는 상관 없는, 현실 정치의 문제다. 권력이 그토록 활용하고 싶어하는 검찰의 힘이란 다름 아닌 수사권과 기소권이다. 검찰은 두 권한을 독점하고 있다. 수사를 할지 말지, 수사를 하더라도 어디까지 할지, 누군가를 법정에 세울지 말지는 오직 검찰만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다. 무소불위에 가까운 힘이다.
그런 검찰을 보는 국민의 시선에는 두려움과 의구심이 섞여 있다. 피의자, 피고소ㆍ고발인,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청에 가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갈 곳이 못 된다"고. 쿠데타 주역도, 나라를 쥐락펴락 한 세도가도, 대기업 회장도 검찰에 출두할 때는 다리가 풀리고 목소리가 떨렸다. 하물며 힘도, 빽도, 돈도 없는 국민들은 오죽할까. 죄 없는 사람도 검찰 앞에선 괜히 주눅 들고 오금이 저린다.
그럼에도 검찰은 감시나 견제를 받지 않는다. 비법률가들이 전문 법률가 집단인 검찰을 감시하기란 쉽지 않다. 법률가들도 검찰의 파워 앞에서 그들의 눈치만 살핀다. 은밀히 진행되는 내ㆍ수사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검찰이 내ㆍ수사 기록을 공개하는 일이 거의 없으니 감시와 견제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검찰은 없는 죄도 만들고, 있는 죄도 없는 걸로 할 수 있다"는 극단적 비난까지 나오는 것이다.
검찰이 손에 쥔 칼을 잘 쓰면, 정당하고 공평하게 쓰면 문제될 게 없다. 공정한 수사ㆍ기소권 행사로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 주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난해 검찰은 참여 정부 인사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저인망 수사를 했다.
가족, 친지, 지인 등의 금융계좌, 통화내역 등을 이 잡듯 뒤졌다. 구속영장이 기각되면 적용 법 조항을 바꾸거나 추가 수사를 통해 새 혐의를 발굴해서라도 영장을 재청구했다. 구속수사의 편의성에만 기대어 인권 보호는 물론 무죄 추정 원칙이나 불구속 수사 원칙은 무시했다.
그 과정에서 수사 대상자의 명예가 실추되고 인격이 훼손돼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기업 수사로 정권의 낙하산 인사를 용이하게 했고, 촛불ㆍ미네르바 수사처럼 집회ㆍ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수사로 정권의 이념에 충실했다. 임채진 전 검찰총장의 고백처럼 법무장관을 통한 정권의 통제에는 항변의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는 주저했다.
국민 편에 서기가 그리 어렵나
검찰은 이것만으로도 고개를 숙여야 한다. 살아 있는 권력과 대척점에 섰다가 권력의 편에 선 변신에 대해, 그를 통해 국민이 잠시 잊고 있던 권력의 무서움, 법치의 불공정함을 새삼 일깨워준 데 대해….
검찰이 신뢰를 회복하는 방법은 자명하다. 권력의 편에서 권력을 쳐다보지 않으면 된다. 국민 편에서 국민이 공감하는 공평한 수사를 하면 된다. 강한 자에게 강하면 된다. 그러면 표적ㆍ편파 수사 말도 안 나올 것이다. 힘들지만 그게 정도다. 하지만 권력이 검찰을 내버려 둘까. 그래서 답답하다.
황상진 논설위원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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