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중반 어느 가을날이다. 작곡가 박시춘 선생이 나한테 전화를 했다. "정기자! 지금 머하고 있능교?" 박선생의 독특한 경상도 사투리는 항상 정겹다. "기사 마감하고 있는데 곧 끝납니다"라고 대답도 다 하기 전에 성미 급한 그는 "아무리 바빠도 그마 퍼뜩 오이소"하곤 전화를 내려놨다.
나는 속으로 씨익 웃었다. 뻔한 시추에이션이다. 스카라 계곡 인현동 대폿집 2층에서 한잔 기우릴 것이고, 파트너는 두말할 것 없이 작사가 반야월 선생일 것이다. 오후 2시 조금 지난 때였지만 이분들에게 시간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20분쯤 후에 나는 내 추측대로 정확하게 인현동의 대폿집 2층 앉아 있는 두 분을 만났다. 그 방에는 또 한명의 젊은 작곡가와 작사가이면서 평론가로 활동하는 윤익삼이 앉아 있었다. (윤익삼은 지금까지도 반야월 선생을 측근에서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다니고 있다.)
그들은 이미 얼큰하게 취해서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급하게 만나자고 한 이유는? 이라고 묻기도 전에 박시춘 선생은 새로 나온 와이담 (음담패설의 일본식 표현)이라면서 순식간에 서 너 가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리고 반 선생은 늦게 온 나한테 술을 연거푸 따라줬다.
반야월은 박시춘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실제로 깍듯이 형님 대접을 했다. 1913년생으로 4살 연상이기도 하지만 박시춘의 음악성과 인간미를 반야월은 진실로 존경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다가 두 분 중에 한 분이 먼저 돌아가시면 어쩌려고 그러세요?"라고 주변에서 질투(?)를 할 정도로 그들은 함께 지냈다. 박시춘은 1996년, 우리 나이로 84세에 타계했다.
반야월은 1917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금년에 우리나이로 93세이다. 대중가요계의 최고 원로이고 산 증인이다. 20대 초반에 전국 가요 콩쿠르에서 1등을 하면서 가수로 데뷔했으니까 70년 이상을 대중음악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본명인 박창오 대신 '진방남'이란 예명을 만들어 가수생활을 했다. 콩쿠르에서 1등을 한 다음 해에 <불효자는 웁니다> 를 불러 크게 이름을 날린다. 이 노래는 지금도 많은 가수들이 앞 다퉈 부르고 있으며 코미디언 김희갑이 눈물을 흘리며 불러 감동을 주기도 했다. 불효자는>
그 후 많은 히트곡을 취입한 진방남은 가수보다 노랫말을 만드는 작사가의 역할을 택한다. 그리고 필명을 '반야월'이라고 지었다. 보름달처럼 꽉 차 있는 달은 언제가 다시 반쪽이 될 것이니까 반달로 이름을 지어 놓으면 둥근달을 그리며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무너진 사랑탑, 유정 천리, 일자 상서, 남성 넘버원, 가는봄 오는봄 등 봇물 터지듯이 노랫말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다보니 반야월이 작사한 가요가 너무 많아지게 된다.
그래서 그는 필명을 여럿 만들었다. 반야월이란 이름 다음으로 유명한 필명으로 '추미림'이 있다. 울며 헤어진 부산항이 추미림으로 발표 되었다. 그 외에도 고향초, 옥단춘, 박남포, 금동선, 남궁려, 백구몽 등등이 그가 갖고 있는 또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한 때는 각기 다른 사람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의 창작에는 쉼표가 없다. 울고 넘는 박달재, 만리포 사랑, 삼천포 아가씨, 소양강 처녀, 등등, 그 자신도 정확하게 알 수 없을 만큼 다작을 했고 지금도 가사를 쓰고 있다.
최근에는 '청계천'을 소재로 한 작품 10여곡을 썼고, '나의 별'이란 노랫말을 완성했는데 곧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가 만든 노래는 과연 몇 곡이나 될까? 음악 저작권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노래만도 900점 정도라고 하는데 아마도 통틀어서 5,000곡은 될 것이라고 한다.
그가 만든 가요들을 보면 독특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미아리 고개, 박달재, 만리포, 삼천포, 소양강, 부산 등 지명이 들어간 노래가 유난히 많다. 그가 쓴 가사 제목만 가지고 전국 일주가 가능할 정도이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 지역에서 그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시비(노래비)' 또는 노래 동상을 만들었다. 현재까지 전국에 10개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충북 제천시는 박달재를 유명하게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그를 명예시민으로 위촉하기도 했다.
박달재 뿐만이 아니다. 천등산도 유명해졌고, '금봉이 묵'도 유명해졌다. 박달재에 가면 고개 정상에 있는 휴게소에서 하루종일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가 여러 명의 가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온다.
그 바람에 그 동네서는 새들도 그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우스개 소리 조차 있다. 실제로 이곳은 터널이 생겼는데도 일부러 고개 위에 올라와서 사진을 찍고 '금봉이 묵'도 사 먹고 가는 관광지가 되었다.
노래 한 곡의 힘이 지역경제에 큰 도움이 된 멋있는 사례인 것이다. 어찌 박달재 뿐 이겠는가. 충남의 만리포도 그렇고, 춘천의 소양강도 예외는 아니다. 소양강에는 처녀 상을 동상으로 만들어 세워 놓았다.
반야월 선생의 이미지는 젊은 시절이나 90세가 넘은 지금이나 한결같이 '신사'다. "나이 들수록 깨끗하게 하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언제나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다닌다.
그의 말대로 '제 2의 고향'이라고 하는 '스카라 계곡(을지로 3가에서 퇴계로로 향하는 길)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는데 그가 있는 곳엔 항상 여러 명의 후배들이 함께 있다. 지난 6월 4일 한국 음악 저작권협회가 주최한 공청회에서 나는 반 선생을 만났다.
그는 나를 보더니 반갑게 악수를 청했는데 악수할 때의 힘은 여전히 강했다. 한 가지 몇 년 전과 달라진 것은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는 후배들을 아주 좋아한다. 더구나 기억력이 비상해서 사람의 이름이나 지난날의 에피소드 등을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다.
반 선생에 대해 이야기 할 때에 늘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술'이다. 그는 그야말로 두주불사다. 2차 3차는 물론이고 한창 때는 심지어 8차까지 간적도 있다.
지금은 그렇게 까지는 하지 않지만 아직도 후배들과 술을 마시며 담소하기를 좋아 한다. 후배들도 그를 만나는 것을 아주 좋아 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그는 아직 현역이다. "죽을 때 까지 나에게 은퇴란 말은 없다" 반야월 선생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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