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은 우리 현대사에서 아주 획기적인 해였다. 해방 15년, 비극의 한국전쟁이 휴전된 지 7년, 그리하여 4월혁명이 일어난 바로 그해였다. 한국일보는 그 해 9월 어느 날 한국출판문화상을 제정한다고 사고(社告)를 내었다. 장기영 발행인은 1950년대 중반 신문을 창간하면서부터 문자 그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신문계에 그때까지 보지 못하던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 무렵 우리 출판계는 아주 낙후한 채 몸부림치고 있었다. 식민지라는 황무지, 한국전쟁이라는 초토를 거쳐, 이승만 독재정치라는 동토(凍土)에서 가녀린 싹을 틔워나가고 있었다. 초ㆍ중등학교 교과서나 참고서, 대학교재 출판이 겨우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였다. 그런 속에서도 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 6권이 완간되고, 진단학회의 ‘한국사’ 7권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장기영 사장은 을유문화사 정진숙 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 회사가 출판계를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소”라고 제안했다. 이미 을유문화사는 한국번역문학상을 1957년부터 운영하고 있었다. 정진숙 선생은 을유에 돌아와 안춘근 기획실장의 안을 따라 출판문화상 제도가 좋겠다고 하자, 장기영 선생이 즉각 채택한 것이었다.
한국출판문화상은 첫 회부터, 출판계만이 아니라 대학을 비롯한 학계에 더 큰 충격을 주었다. 1960년대는 학술상이 전혀 없는 때였다. 1980년대까지도 그리 많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출판문화상의 ‘저작상’은 학자들에게는 최고의 영예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다.
저작상을 낸 출판사는 자부심을 지니는 것은 물론이요, ‘제작상’(지금은 ‘출판상’)을 받는 것 또한 영광이다. 제작상 수상작은 우리 출판문화의 다양한 역량을 한껏 자랑한 것이기도 하다. 지난 50년 가까이 가을이 되면, 우리 출판계는 말할 것 없고 옹골찬 저술활동에 매진하는 학자들도 한국출판문화상 발표에 눈길을 모은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 학술상도 많아졌고 우수학술도서 선정 작업도 늘어났지만, 어려운 여건에서도 한 회도 거르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한국출판문화상을 앞으로도 알차게 꾸려가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우리 공동체 문화의 현실은, 최선진국 대열에 끼려면 ‘당당 멀었다.’ ‘시민문화의 고급화’와 ‘고급문화의 대중화’를 이루려면, 그리고 우리 겨레가 21세기 세계 문화전쟁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고급문화의 핵심인 학문과 예술 그리고 과학기술을 활짝 꽃피워야 한다. 그러려면 고급문화의 보호막인 언론ㆍ출판ㆍ교육이 함께 어깨 겯고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김경희ㆍ지식산업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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