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김민규(15ㆍ가명)군은 전형적인 모범생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래 1등과 반장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 3년 전인 초등학교 6학년 여름 어느날 밤. 그는 이날의 생경했던 기억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자정을 넘겨 깊은 잠에 빠져든 그의 어깨를 누군가 거칠게 흔들었다. "쉿! 아빠 믿지? 조용히 따라와!" 아버지는 민규를 흔들어 깨우고는 이내 방문 밖으로 사라졌다.
옆에서 책가방과 옷가지를 챙기던 어머니도 부리나케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났다. "아빠 무슨 일이야? 엄마 무슨 일이냐고?" 하지만 되돌아온 말은 "쉿!"이라는 한 마디 뿐이었다.
핸들을 잡은 아버지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좀처럼 과속을 하지 않던, 신호를 철저히 지키던 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백미러로 뒤쪽을 수시로 응시하며 달리기를 2시간. 자동차는 어느 시골의 비닐하우스 단지 앞에 멈췄다.
"다 왔다, 민규야!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란다." 이해할 수 없었다. '멀쩡한 집을 두고 이게 우리 집이라니….' 그날의 이해하기 힘들었던 이사 과정이 바로 '야반도주'였음을 깨달은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빚쟁이들의 독촉을 이길 수 없었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서야 어린 민규는 마음이 정리됐다. 아버지가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한 게 화근이었다.
집만 바뀐 게 아니었다. 생활도 180도 달라졌다. 우선 학교를 갈 수 없었고, 나가서 놀 수도 없었다. 부모님은 돈을 벌기 위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집을 비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2평도 안 되는 비닐하우스에 홀로 남겨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TV 보기가 전부였다. TV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고, 교과서였다.
"꼭 학교에서만 공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EBS 방송을 보면서 공부했죠. 보고 또 보고…." 아버지는 또래들 답지 않게 의젓한 민규의 모습이 대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릴 때가 많았다.
비록 도피 생활을 하는 처지로 전락했지만, 마흔 일곱에 얻은 자식의 교육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 김씨(62)는 "아들의 적을 인근 마을 친척집으로 옮기는 방법으로 초등학교를 마쳤다"며 "어린 나이에 TV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일을 겪으면서도 밝게 자라준 민규가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더 이상 나빠지진 않을 줄 알았다. 이제는 바닥에서 탈출할 일만 남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당뇨와 고혈압을 앓던 아버지에게 합병증이 생겨 심장과 신장에까지 이상이 온 것이다. 아버지의 벌이가 신통치 않으니, 살림살이는 갈수록 궁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영어학원에서 외국인 선생님과 맘껏 얘기해보는 게 민규의 소원이었지만, "돈 벌어 영어학원에 보내주겠다"던 아버지의 약속은 그렇게 멀어졌다.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할 수 없는 처지에 실망했기 때문이었을까. 학교 성적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러던 지난해 5월, 민규에게 한 줄기 빛이 찾아 들었다. "담임 선생님이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주는 곳이 있다는 거에요. 제일 먼저 달려가서 등록했죠." '칼잠'에 이골이 날 만큼 비닐하우스 생활에 적응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민규가 찾은 곳은 KOTRA 사내 봉사동아리 '레프트 핸즈(Left Hands)'가 꾸린 영어공부교실 '아이 오프너(Eye Opener).' 레프트 핸즈는 "보여 주기식, 행사성 봉사 활동에서 벗어나 보자"는 투자조사연구팀 김세진(35) 과장의 제안으로 결성된 소규모 봉사동아리다.
김 과장은 "외국어 실력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KOTRA의 특성을 활용한 봉사활동을 생각하다가 영어공부교실을 만들었다"고 했다.
아이 오프너는 우선 선생님 '채용'에 나섰다. 사내 게시판에 공고를 낸 즉시 20여명의 지원자가 쇄도했다. 토익ㆍ토플 만점자는 물론, 영국ㆍ미국계 외국어 학교 졸업자, 미국에서 장기 체류한 직원, 외국인 직원까지 참여 의사를 밝혔다. '대박'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을 불러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사실 학원에 길들여진 아이들에게 '무료' 프로그램이 주는 신뢰감이 대단할 리 있겠는가. 아이 오프너 간사를 맡은 김한나(28) 대리는 "무료 영어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을 각 학교에 알렸지만, 첫날 수업에 참석한 학생은 민규가 유일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학생들이 점차 늘어 수강생은 금세 10명으로 불어났다.
경사는 겹으로 온다고 했던가. 이 즈음 민규 아버지는 주민등록을 회복해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그리고 며칠 뒤 비닐하우스를 벗어나 방 2칸짜리 임대 연립주택으로 옮길 수 있었다.
아버지 김씨는 "채권자들의 눈길이 맘에 걸렸지만, 민규 공부를 위해 무리를 했다"며 "물심 양면으로 신경을 써 준 KOTRA 선생님들의 격려가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민규의 방과후 수업비와 급식비가 정부에서 지원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였다.
영어 회화를 담당한 외국기업고충처리팀 소인경 에디터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뜻의 '레프트 핸즈'인데, 이렇게 봉사활동 사실이 알려져 쑥스럽다"면서 "더 많은 친구들이 더 큰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된다면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KOTRA가 발간하는 저널 의 찰스 듀어든 에디터는 "부산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쳐 본 적이 있지만, 이번 친구들은 배우려는 열의가 뜨거워 흥이 절로 난다"고 말했다.
민규는 "학교 수업에서 비중이 낮은 읽기ㆍ말하기ㆍ쓰기를 충실히 배울 수 있어 아주 유익하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실제 영어 성적도 많이 올랐다. 민규는 요즘 교사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자신처럼 열의가 있어도 가정 형편 탓에 공부하지 못하는 어려운 학생들을 돕고 싶어서다.
지난해 5월부터 올해 3월까지 8개월의 1기 과정을 마친 아이 오프너는 현재 2기 모집을 준비 중이다. 특히 2기의 경우 해외 연수 프로그램을 포함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김세진 과장은 "평소 해외여행 기회를 갖기 어려운 학생들의 시야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며 "직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회비와 현지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2기부터는 해외 연수를 포함시킬 생각"이라고 말했다.
"열정만 갖고 오세요.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드릴 테니까."(김세진 과장) "더 많은 학생들이 참여해서 가르치는 우리도 더 많이 신났으면 좋겠어요."(김한나 대리) KOTRA 직원들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 KOTRA 국내외 사회공헌 활동
KOTRA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다. 이 때문에 민간기업과 달리 사회공헌 활동에 대규모 재원을 투입하지는 못한다. 대신 직원들의 땀과 십시일반 모은 회비가 봉사활동의 밑거름이 된다.
대표적인 예가 사내 봉사동아리 '레프트 핸즈(Left Hands)'다. KOTRA는 직원들의 자발적인 봉사활동 노력에 발맞춰 2005년 전 임직원이 참여하는 'KOTRA 사회봉사단'을 결성했다.
사회봉사단은 ▲소외계층을 지원하는 '이웃사랑운동' ▲환경정화 활동을 수행하는 '환경사랑운동' ▲1사1촌 자매결연 마을을 돕는 '농촌사랑운동'등 3가지 테마로 활동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활발한 것은 역시 이웃사랑운동이다. 지난해 펼쳤던 주요 활동만 살펴보면, 연말에 노사가 함께 성금을 모아 서초구 자원봉사센터에 전달했고, 어린이날에는 국내 거주하는 몽골 어린이들을 초청해 영화관람과 마술쇼 등 다채로운 행사를 가졌다.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에는 내곡동 비닐하우스 지역 저소득층에게 사랑의 연탄을 배달했다. 또 아름다운가게를 통해 임직원들이 기증한 물품 100여점을 양재점에 기부하기도 했다.
환경사랑운동은 KOTRA 본사가 위치한 서울 강남 지역과 1사1촌 자매결연을 맺은 마을에서 주로 이뤄진다. 지난해 11월 양재천 정화활동을 벌였고, 노인들이 많은 경기 이천 부래미 마을에서 어른들을 대신해 주변 환경을 정리하기도 했다. 특히 부래미 마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구매해 농가소득 증대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농촌사랑운동의 일환이다.
신환섭 KOTRA 총무팀장은 "직원들이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도 개별적으로 하기는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며 "다행히 사회봉사단이 만들어지면서 직원들의 봉사활동 참여가 크게 늘어났다"고 전했다.
전 세계 72개국, 97개 코리아비즈니스센터(KBC)에서 근무하는 KOTRA 직원들의 현지 봉사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뉴욕, 시카고, 실리콘밸리, 토론토 등의 KOTRA 직원들은 현지 양로원에서 청소와 구호물품 등을 전달하며 지구촌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브뤼셀, 바르샤바 등의 KOTRA 직원들도 현지의 불우이웃을 후원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 아테네 KBC의 경우 생활고에 시달리는 한국전 참전 용사들을 지원함으로써 민간 외교관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세계 각지의 한글학교에서 봉사하는 KOTRA 직원들의 수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조환익 사장은 "KOTRA가 현지 사회와 동화돼야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과 수출이 늘어날 수 있다"며 "해외 직원들과 현지 진출 국내기업을 연계하는 등의 방법으로 해외 사회공헌활동에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정민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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