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국가주석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권력이 이양된 2대 세습의 과정과 당시 상황은 지금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김 위원장은 22세 때인 1964년 말단 직책인 노동당 조직지도부 부원으로 출발, 30여년에 걸쳐 후계 수업을 받았다. 그에 비하면 김 위원장의 3남 정운은 단축수업을 받아야 하는 처지다.
정운과 달리 김 위원장은 70년대 초반까지 후계자로 공인받지 못했다. 김일성 주석의 동생인 김영주, 배다른 동생인 평일과 그의 어머니 김성애 등과 권력투쟁을 치러야 했다. 이에 대해선 김 주석이 "공산주의에서 권력을 세습해도 되느냐"는 비판을 의식, 김 위원장이 업적을 쌓고 능력을 인정받을 기회를 주었다는 분석이 많다.
김 위원장은 능력을 객관적으로 입증한 뒤에야 후계자로 공식 추대됐다. 74년 2월이었다. 그는 이미 북한 권력엘리트에 대한 인사권과 통제권을 손에 넣은 상태였다. 이후 김 위원장은 김 주석과 실권을 함께 행사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74년부터 94년 7월 김 주석이 사망할 때까지 김일성_김정일 공동정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김 위원장은 74년 4월 '당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발표해 당을 장악하고, 김 주석의 지원 아래 군과 국가기구들을 장악해 나갔다. 북한 전역에선 김 위원장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아래로부터의 추대'가 진행됐다. 70년대 말부터 김 주석은 주요 국정사업 결정권을 김 위원장에게 집중시켰다. 후계자의 확고한 지지기반과 지도체제 기반을 구축해주기 위한 '왕의 배려'였다. 93년 4월 김 위원장이 국방위원장에 오르면서 권력승계 작업이 마무리됐다.
김 위원장이 후계수업을 받은 시기의 북한 경제사정은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권력 세습에 대한 비판이 나올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셈이다. 김 위원장은 '속도전'이라는 구호를 제시하고 주민을 총동원한 생산력증대 운동인 '70일 전투', '100일 전투' 등을 지휘, 지도력을 입증했다. 정운이 최근 '150일 전투'를 주도하고 있다는 설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인 것으로 보인다.
최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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