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아프게> 라는 노래가 깜짝 놀랄 정도로 팔려 나가게 되자 영화사에서 연락이 왔다. 같은 제목으로 영화를 제작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남진을 주인공으로 출연 시키는 조건이었다. 가슴>
상대역인 여자 주인공역은 당시 인기 절정에 있던 문희가 맡았다. 영화 또한 대박이었다. 나는 영화사로부터 노래 제목에 대한 사례금으로 40만원을 받았다.
이 돈은 내 월급의 두 배가 넘는 돈이었다. 남진은 그 후로도 많은 영화에 출연을 했다. 영화사든 레코드 회사든 간에 남진에 관계되는 모든 일은 나한테 연락이 오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진과 그의 어머니는 나한테 모든 결정을 맡기면서 후견인 역할을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나는 고민이 되었다. '신문기자가 이래도 되는 것인가' 하는 고민이었다. 그래서 내가 몸담고 있는 한국일보의 '왕초'(장기영 사주)한테 사정을 말씀 드렸다. 왕초는 흔쾌히 OK 했다. 나는 얼떨결에 남진의 인기를 관리하는 스타 매니지먼트 일을 맡게 된 셈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이수만이나 박진영과 같은 그런 일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연예기자 1호지만 스타 매니지먼트 1호이기도 한 셈이다. 기왕 매니지먼트 일을 할 바에야 제대로 한번 해 보고 싶었다.
몸으로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인기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모른다. 선풍적 인기라는 말이 있다. 회오리바람과 같이 몰아치는 모양인데 남진의 인기가 그랬다. 1966년은 지금부터 43년 전이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다고 해서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서 행동을 하지 못하고 선물과 편지를 보내는 정도가 대부분이었지만, 남진은 달랐다. 공연장에 들어가고 나올 때 몇 백명씩 달려드는 바람에 때로는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솔직히 연예인 인기관리를 해 본 경험 있는 사람이 없는 불모 상태였기에 우리는 매우 당황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외국의 예를 참고로 해서 스케줄이나 경호 플랜 등을 만들었다.
나는 신문기자 일로 바쁘기 때문에 그와 항상 동행하는 로드 매니저를 두어서 자가용 승용차의 운전도 하도록 했다. 그리고 매일매일 나한테 보고하는 시스템으로 갔다.
그런데 남진은 연예인으로서 '끼'를 가지고 있지만 자기관리에는 약했다. 아무리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고 하지만 잘못하다가는 그 인기를 오래 지탱할 수 없는 것이 연예계의 풍토다. 항상 조심하고 처신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고 잔소리를 했는데도 가끔 말을 듣지 않았다.
지방의 극장들이 남진을 초대해서 흥행을 하려고 돈을 싸 들고 오는데 그 돈을 전부 받고 출연을 하면 얼마 안가서 2류 가수로 전락 할 수가 있으니까 갈 곳 안 갈 곳을 가려서 출연하기로 원칙을 정 했다. 그럼에도 아직 나이가 어린 탓인지 그는 나한테 말도 없이 돈을 받고 지방 공연을 다녀오곤 했다.
이건 사실 큰 문제였다. 당장 눈앞에 있다고 사탕을 냉큼 받아먹으면 그 뒤에는 아픔이 온다는 것을 그는 미처 헤아리지 못 했던 것이다. 나는 여러 차례 경고를 했다. 제2, 제3의 히트곡도 준비해야 하고 이미지와 캐릭터를 수준 있게 정립해야 하니까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엄하게 꾸짖으면 한동안 근신하다가도 얼마 지나고 나면 또 다시 어긋나곤 했다. 심지어는 나한테는 비밀로 하고 로드매니저와 함께 지방 공연을 가기도 했다. 나는 매우 화가 났다. 배신감조차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남진을 차에 태우고 고려대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밤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굳이 고려대로 간 이유는 그곳이 매우 조용하고 또한 남진이 사는 집에서 가깝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간 야구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만 최고가 아니라 일본까지 진출하는 톱클래스 스타로 만들고 싶었는데 네가 그토록 어긋난다면 나하고 함께할 이유가 없다." 나는 그에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 하라고 했다.
내가 준비한 야구방망이로 몇 차례 얻어맞고 정신을 차리든지 아니면 얻어맞지 말고 그냥 이 자리에서 나하고 헤어지든지 택하라는 것이었다. 나하고 헤어질 것이면 야구방망이가 필요 없는 것이라서 나는 방망이를 바닥에 던져 놓았다. 로드매니저는 옆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나는 솔직히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줄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즉시 운동장 흙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맞겠습니다. 제가 잘못 했습니다.
저는 절대로 선생님과 헤어질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엎드려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이제는 내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되었다. 정말로 방망이를 들어서 그를 때릴 것인가, 아니면 엄중하게 야단이나 치고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甄?
그러나 나는 방망이를 들었다. 이것이 그를 올바르게 이끄는 최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납작 엎드려 있는 그의 엉덩이를 나는 야구방망이로 내리쳤다. 얻어맞고 아파서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나도 가슴이 아팠다.
두 번 세 번 그리고 다섯 번을 때렸다. "이제 되었다. 일어나라"고 말하자 그는 무릎을 꿇고, 다시는 일을 그르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역시 남진은 남자다웠다.
그날 밤 나와 남진과 로드매니저 세 사람은 가까운 대폿집에 가서 막걸리를 마시고 노래를 실컷 불렀다. 그리고 이 일은 앞으로 20년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세 사람만 아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43년이 지난 지금, 이 이야기를 글로 쓰려니 그도 60살이 넘었는데 괜찮을까 싶어서 내가 그에게 전화를 해서 이 이야기를 쓰겠다고 했더니 "아이구 좋습니다. 대부님"이라고 대답했다.
또 다시 남진의 남자다운 면을 봤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후에 그는 자원해서 해병대에 입대, 69년 월남에 파병 됐다. 71년 제대한 다음날 나를 찾아와 다시 옛날처럼 도와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