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압도적 충격이었다. 토요일(23일) 아침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 국민들은 제 귀와 눈을 의심했다. 자살에 의한 서거라는 사실엔 전율마저 느꼈다. 소설가 신경숙씨는 "항구 대합실에서 TV 자막으로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확인한 순간 머리가 펑 소리를 내며 터져버리는 듯했다. 결국 배를 놓쳤다"며 당시 심경을 전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식의 공황만은 아니었다.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도 복잡하게 뒤섞였다. 사람들은 고인이 전직 대통령 중 세 번째로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되던 광경을 되새겼고, 그토록 강조하던 도덕성에 상처를 입은 그에게 쏟아지던 비난을 떠올렸다. 나아가 대통령 재임 당시 좌우 어느쪽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던 그의 처지를 기억했다.
그래서 애도이되 미안함 서린 애도였다. 회사원 양모(32)씨는 "취임 초 민주당 분당 때 노 전 대통령에게서 등을 돌렸고 욕도 많이 했다. 비극적 죽음 앞에 (나 자신이) 자유롭지 못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서거 이후 인터넷 애도 문구로 자주 등장하는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도 이런 감정의 발로였다. 황상민 연세대 교수는 "갑작스러운 서거를 맞닥뜨린 국민들의 잠재의식에 '나도 공모자'라는 죄책감이 자리한 걸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장례 기간 내내 추모 행렬은 끝이 없었다. 그 수가 500만명을 넘어설 만큼 국가적인 애도 물결이었다. 그러나 밑에 깔린 민심은 시간이 갈수록 요동치고 분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우선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애도를 현 정부에 대한 불만과 연결짓는 민심이 감지됐다. 29일 서울광장 노제를 찾은 홍모(63)씨는 "어렵게 대학 보낸 자식들이 취직도 못하니 답답하다. 나도 이회창 찍었던 사람이지만 죽은 노무현이 산 이명박을 이기는 이유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덕수궁 앞 분향소의 한 자원봉사자는 "날이 갈수록 서럽게 우는 이들은 줄어들고, 경찰의 지나친 집회 통제 등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이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고 전했다.
고인의 타살 가능성을 제기하는 음모론이나 정치보복설 같은 극단적 주장 역시 반(反)정부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27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국정운영 지지도는 27.4%로, 지난 4월(32.7%)보다 5.3%포인트 하락했다.
반정부 민심이 집단행동으로 발전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현 정부가 권위주의 통치로 회귀하는 상황에서 노 전 대통령의 서거가 인권, 민주주의 등 시대정신을 새삼 환기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시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분노와 동정심을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촛불시위를 능가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망자 앞에서 옷깃을 여미면서도 이번 서거가 또다른 분열의 씨앗이 되지 않길 바라는 민심도 있다.
이모(65)씨는 "가난하고 엄혹한 시대를 함께 헤쳐온 동년배다 보니 친한 친구를 잃은 듯하다"며 "유서에도 나와있듯 용서와 화해가 노 전 대통령의 진정한 뜻"이라고 말했다. 영결식에 참석한 한 시민은 "장례 기간이 끝난 만큼 고인의 유지대로 북한의 무력도발 위험 등 눈앞에 닥친 문제 해결에 온 국민이 마음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는 "국민 대다수가 순수한 마음으로 추모에 임했던 만큼, 전직 대통령을 평가하는 정치문화 등을 차분하게 성찰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각에선 일주일간 전국을 달궜던 추모 열기를 평가절하하는 반응도 나왔다. 특히 일부 우파 인사들은 "서거 대신 자살이란 용어를 써야 한다", "자살을 택한 사람이 왜 존경 대상이 되나" 등의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좌파 진영에서도 인터넷을 중심으로 "노 전 대통령 임기 중 추진된 미군기지 이전, 한미 FTA 등으로 희생 당한 이들이 많다", "고인의 마지막 선택은 자유, 평등, 정의 등과 어떤 연관성도 없다"는 등의 의견을 내놓고 있다.
감정의 흐름은 이처럼 다양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이 던진 파장이 향후 우리사회 변화에 상당한 힘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어 보인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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