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언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는 비극이다. 그것도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헌정 사상 유례없는 비극이다. 지금은 추모와 애도 분위기가 넘치면서 모두가 한 목소리로 노 전 대통령 서거를 국민통합으로 승화하자고 외치고 있다. 하지만 비극은 본질적으로 비극을 잉태하고 있다. 그 내부에는 분노와 갈등이 내재돼있어 자칫 나라 전체를 혼돈의 소용돌이로 몰고 갈 위험성이 가득한 것이다.
비극의 악순환을 막고 진정 국민화합을 이루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특히 나라를 이끌어가는 집권세력이 지난 1년 반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잘못이 있었다면 고쳐야 하고 노력할 대목이 있다면 노력해야 한다. 그게 집권자의 의무이며 그 성찰에 우리 사회 모두가 지혜를 모으고 나눠야 한다.
●법치주의 - 공권력 앞세우지 말고, 서민의 아픔 보듬어야
현 정부 들어 법치주의는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신기루 같은 존재다. 국정지표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늘 법질서 확립을 강조했지만, 법을 집행하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반감은 커졌다. 법치가 뒤로 가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법치는 본래 권력의 자의성을 제어하고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개념이다. 국민들이 법을 준수하도록 강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권력의 행사를 법에 기속시킨다는 의미가 더 크다는 얘기다. 또한 법으로 인해 남보다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는 의미도 강하다. 그래야 법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다시 법치주의가 강화되는 선순환이 가능하다.
하지만 현 정부는 법치주의를 주창하면서 법치를 실현하는데 소홀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우선 법치의 초점을 공권력보다는 국민에 맞췄다. '법대로'를 내세워 국민을 통제하는데 몰두했고, 법치가 기본권 위에 군림하는 공권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됐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촛불 집회는 사회불안 조장으로 등식화 했고 용산 철거민은 제압해야 할 대상이었다. 물론 시위의 폭력성은 자제돼야 하는 게 마땅하지만 촛불 집회나 노동자들의 주장이 억지를 쓰는 '떼법'으로 간주되며 무시되는 경향이 생겼다. 여기에다 "법과 질서만 제대로 지키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1% 올라간다"는 경제논리가 법치주의와 연결되면서 여론이나 민심을 청취하기보다는 효율적으로 제어하는데 주력하는 인상을 주고있다.
형평성 문제도 있다. 양도세 중과세 금지조항은 법이 통과되기도 전에 시행하면서 철거민들의 열악한 생존권 문제는 언제 보장될지 감감하다.
따라서 법치주의를 온전히 복원하기 위한 정부의 인식전환이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정희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31일 "정부가 말로는 법치를 강조하지만 여전히 권위주의 시대의 흑백논리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다 보니 여러 폐단이 생긴 것"이라며 "약자에 대한 법의 보호가 먼저 이뤄져야 진정한 법치주의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검찰 수사관행 - 수사 형평성 확보하고, 무죄추정 원칙 지켜야
노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검찰의 수사관행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기소 전에 피의사실을 언급하거나 언론에 흘려 보도되게 하는 관행이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지적이 공감을 얻고 있다.
이런 수사관행은 헌법상 무죄추정 원칙을 넝마로 만들고 있다. 노 전 대통령도 2006년 회갑기념 선물로 박연차씨로부터 1억원 상당의 고급시계 2개를 받았다는 혐의사실이 흘러나오면서 큰 모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전직 대통령조차 이런 잔인한 수사 앞에서는 이미 죄인으로 낙인 찍혔다.
이런 사례는 여러 번 있었다. 2003년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을 비롯 2004년 안상영 부산시장, 박태영 전남지사, 이준원 파주시장 등이 자살했다. 2005년 국정원 도청사건 수사 때는 이수일 전 국정원 2차장이 목을 맸다.
형법 제126조에서는 검찰이나 경찰이 피의사실을 기소 전에 공표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피의자측이 수사검사를 고소하기 힘든 게 현실이며 검사가 동료 검사를 기소할 리 만무하다. 재정신청제도가 있지만 형사처벌 가능성은 낮다. 사실상 검찰이 월권을 해도 제어할 수단이 없는 것이다.
선진국의 경우 수사중인 사건은 원칙적으로 브리핑을 하지 않거나 엄격한 기준에 따라 예외적으로 실시한다. 미국의 경우 연방검사 업무지침에 '대언론관계'란 제목의 17개 항목을 통해 주의사항이 상세히 규정돼 있다. 기소 시 보도자료에도 "기소 범죄사실은 단순한 혐의에 불과하며 재판확정 시까지 무죄로 추정된다"는 점이 명시된다.
표적수사 논란도 곱씹을 대목이다. 산 권력에는 약하고 죽은 권력은 처참하게 단죄한다는 비난이 나오고 있고, 그런 맥락에서 권력 핵심부의 의중이 영향을 미치고 검찰총장의 지휘를 받아 권력형 비리사건을 처리하?대검 중수부의 폐지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장영수 교수 "검찰 브리핑보다 비공식적으로 수사정보가 흘러나오는 게 더욱 큰 문제이고 피의사실 공표로 입증하기도 힘들다"며 "중수부가 폐지돼도 수사관행이 관건인 만큼 검찰수사의 형평성 및 일관성 확보가 가장 시급하다"고 말했다.
●국정운영 - 일방통행식 벗어나 '낮은 자세' 전환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추모하기 위한 분향소에는 '바보 노무현, 우리는 당신을 사랑했다' '님의 뜻을 잊지 않겠다'는 글들이 유독 많았다. 사랑하고 잊지 않는다는 것은 그를 이해하고 감정이입이 됐다는 의미다. 정치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소통이 이루어진 것이다.
정치권은 끝없는 추모 행렬을 보면서 소통의 위력을 확실하게 절감했다. 특히 여권은 노 전 대통령과 공고하게 묶인 엄청난 인파 만큼 이명박 정부와는 어긋나 있는 국민들이 많다는 사실을 목도했다. 그래서 "진정한 소통의 정치, 국정운영 방식의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는 자성론이 여권 내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소통 부재가 가져오는 파괴적 현상은 지난해 한미 쇠고기 협상에 반발한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이명박 정부는 말로는 반성한다고 했지만 실제 국정운영에서는 일방통행으로 엇나갔다. 인사, 정책에서 지역이나 계층편중 시비가 뒤따랐고 일방통행 논란이 계속됐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그런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쇄신특위 위원인 김성태 의원은 "속도전으로 상징되는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확산됐다"고 진단하면서 그 사례로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세 완화 추진 ▦제2 롯데월드 신축 승인 등을 제시했다.
한나라당 내 소장파 초선 의원 모임인 민본21이 15일 외부기관에 의뢰해 실시,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해 '국민의 의견과 동떨어진 일방통행이 많다'는 응답이 무려 77.0%에 달했다.
이 때문에 국정운영 방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무엇보다 민심을 듣고 소통하려는 낮은 자세부터 취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된다.
이내영 고려대 정외과 교수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의 주된 내용은 민심과 소통하려는 의지가 없어 보이고, 이 때문에 오만하게 비쳐진다는 것"이라며 "그런 점에서 국민과의 소통, 야당과의 소통, 여당과의 소통을 어떻게 하면 잘 할 것이냐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한나라당 한 당직자는 "국회는 민심 수렴과 소통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며 이 대통령이 여의도 국회를 중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계층 분열 - 이념·계층·지역 갈등, 더 늦기전에 해소해야
'사회 양극화와 빈부격차 해소', '계속되는 보수와 진보의 소모적 대결', '해묵은 지역갈등'….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미완으로 남기고 간'사회통합'의 이상이 치유할 중요한 환부가 바로 계층 분열이다.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계층 간 갈등과 분열을 이제는 해소해야 할 때라는 반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현 정부가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편다는 비판이 계속 나올 정도로 경제적 계층간 분열이 심화하고 있어 이의 해소가 시급하다. 그래서 '감세정책', '종부세 폐지' 등 양극화를 조장하는 정책을 되짚어 보자는 주장도 나온다.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 가진 자 위주의 정책이 가속화해 빈부차이가 더 벌어진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현 정부의 모든 정책이 가진 자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면서도 "지금보다 소득 분배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계층 분열은 진보와 보수의 이념갈등에 직ㆍ간접적으로 투영된다. 보혁대결은 '건국이래 최악의 남남갈등'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국론 분열을 유발하고 있다.
우리 이념대립은 외국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의 이념대결엔 너무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든다"며 "양측이 한걸음씩 물러나 관용의 정신을 발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성숙된 상생의 문화를 조성하자는 얘기다.
김일영 교수는 "언론과 지식인들이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확대하기보다 양쪽이 공통분모를 찾으려는 노력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만큼 여기에도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지식인의 역할을 당부했다. 손호철 교수는 "야당과 진보세력이 (이번 사건을) 단순히 영향력 회복의 수단으로 삼지 말고 정책대결로 방향을 전환, 건설적으로 활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수도권과 지방, 영남과 호남으로 상징되는 해묵은 지역갈등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김호기 교수는 "전 정부의 국가균형발전 추진은 매우 중요하다"며 "전 정부 정책이라고 폐기하기 보다 지역 격차 해소를 위해 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광수 기자
박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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