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는 정신적 지체 상태에 빠져 있다. 세상은 휙휙 변하는데 구태적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를 의연히(?) 지켜 낸다. 사람들이 정치라면 혀를 끌끌 차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최근 한나라당과 민주당 일각에서 구태 탈피를 위한 작은 노력이 시작됐다. 소중한 첫 걸음이다.
한나라당의 4ㆍ29재보선 전패는 역설적으로 당의 현대화, 특히 이념의 현대화를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됐다. 당내 개혁파 사이에서 우편향 노선을 수정하자는 요구가 일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나라당이 위기 타개를 위해 만든 쇄신특위에서는 부자정당, 수구정당 이미지를 떼내야 한다는 얘기가 회의 때마다 거의 공식처럼 나오고 있다.
민주당에서는 17일 더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뉴민주당비전위원회(위원장 김효석 의원)가 '뉴민주당 플랜' 초안을 통해 새로운 당 노선을 밝힌 것이다. 초안은 민주당의 3대 가치로 '더 많은 기회' '더 높은 정의' '함께 사는 공동체'를, 2대 발전전략으로 '포용적 성장'과 '기회의 복지'를 제시했다. 기존의 분배 중시 노선에서 탈피, 보수주의 측이 강조해 온 성장주의와 기회 균등 개념까지 포괄하는 '성장 분배 동시 달성 모델'을 내놓은 것이다.
1980년대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가 성공하면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보수파는 신자유주의 신봉자가 됐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양극화와 주기적 위기 등 지나친 자유로 인한 부작용이 부각되자 보수파 내에서 중도 수정론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특히 최근 세계경제 위기가 신자유주의에서 기인했다는 지적이 일면서 이 같은 현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신자유주의 전도사로서 마지막까지 이를 부여잡고 있던 미국 공화당에서도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정권을 내 준 이후에는 쇄신파가 급격히 힘을 얻고 있다.
진보파의 변화는 더 일찍 시작됐다. 81년부터 12년 간 정권을 잃었던 것이 좌파 원리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한 미국 민주당은 리더십카운슬을 만들어 '성장과 기회'라는 새로운 좌표를 제시했고, 이는 93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집권으로 귀결됐다. 여기서 힌트를 얻은 영국 노동당도 '제3의 길'을 모토로 삼아 97년 정권을 창출했다.
국제적 정치 조류에 비춰 볼 때 한국 진보주의는 변화에 10년 이상 뒤처졌고, 보수주의 역시 꽤 지체돼 있다. 비록 일부라고 해도 한국 정치권이 뒤늦게나마 밀린 숙제를 하겠다고 나선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가 크다.
변화가 이 같이 지당한데도 저항은 예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우선 한나라당은 주류 측에서 "진보정권 10년의 잘못을 되돌려 놓는 것인데 그러면 과거로 돌아가라는 말이냐"는 비판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주요 정책들이 필요성과 효과 측면에서 제대로 검증된 것인지, 혹시 진보정권이 했다고 무조건 반대로만 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대다수 정책들에 대해 국민 여론이 싸늘한 이유를 잘 생각해 봐야 한다.
민주당의 경우 비주류를 중심으로 "지나친 우경화다"는 반발이 거센데 사실 기존의 민주당이 좌편향 아니었는지, 그것이 낮은 지지율의 고착화로 연결된 것은 아닌지 검토해 볼 일이다. 또 "남의 토끼 잡으려다 집토끼 놓친다"는 반론도 있는 모양인데 솔직히 말해 민주당은 '남의 토끼'까지 노리는 모험을 걸지 않으면 집권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변화를 거부하면 결국 남는 것은 소멸뿐이다.
이은호 정치부 차장 leeeun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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